2022년 작고하신 시대의 지성, 고(故) 이어령 선생이 지은 '메멘토 모리'라는 시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삶이라는 고통스러운 공간에 놓이게 되지요. 아이는 탄생의 순간, 죽음으로 향하는 시작점을 큰 울음으로 열어 젖히는 셈입니다. 삶의 시작이 결국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출발점이라는 사실은 삶 전체를 관통하는 무거운 주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살고 싶진 않습니다. 당연히,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니까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죽음은 전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대상인 탓에 우리는 죽음을 은밀하게 영성의 사이에 끼워넣기도 합니다. 일종의 회피겠지요. 또, 우리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주 망각하곤 합니다. 인간의 역사에 등장한 위대한 건축물들,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어 전 대륙을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을 꿈꾸던 고대의 왕들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인간은 순간의 욕구와 욕심에 충실하지만, 그러한 욕망도 결국 죽음이라는 현상으로 끝맺어 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삶과 죽음은 맞닿아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진화를 통해 심적 간극은 점점 더 커져만 갑니다. 삶의 매 순간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피해 살아남기 위하여, 우리의 뇌는 이 순간 자신에게 가해지는 자극을 항상 경계해야 하니까요. 뇌는 개체의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태동하는 초기에는 삶 전체를 넓고 느긋하게 보거나, 삶이 부질없음을 깨달은 채 ‘내려 놓고’ 살아가는 이들은 진화적인 관점에서 그리 잘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이 순간의 생존을 생각해야 하는 이들, 모든 자극에 대해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이들이 결국 오랫동안 살아남고, 유전자에 각인된 정보가 후손들에게도 흩뿌려집니다.
그 결과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매일 펼쳐지는 하루, 그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스트레스에 의연하지 못합니다. 일상에 방해가 되는 일이 생기면 전전긍긍하고, 불안을 느끼죠. 유전자에 깊이 새겨진 생존 본능 때문입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는 삶의 처음과 끝 전체를 다 돌아보기보다 다분히 근시안적입니다. 인간의 뇌 안에 또아리 튼 불안 체계(anxiety network)는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위험한 일이 생겼다고 ‘예상’이 되기만 하면 마음에서 난리가 나기 시작합니다.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고, 나는 거기에 대해서 무기력할 거라는 식의 생각들이 가지를 뻗어갑니다. 어떻게든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통제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여겨집니다. 느긋함, 차분함, 여유는 우리 인간에게 요원하게만 느껴집니다. 긴 호흡으로 마음을 돌아보는 명상이나 요가 등이 현대 사회에서 각광받는 것은 이렇게 우리 몸과 마음에 자리 잡은 조급함을 어떻게든 다잡아 보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씁쓸한 유행에는 현대인의 삶 곳곳에 숨어 있는 스트레스 요소들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는 무의식적 욕망이 숨어 있을 겁니다.

근시안적 불안에서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걱정과 염려, 불안을 호소하며 진료실을 찾아오는 분에게 자주 들려드리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모습을 100미터 상공 위에서 바라 본다면 어떤 모습일까요?"하고요. 머리 위를 부유하며 촬영하는 드론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이 공간에서 머릿속 가득찬 걱정, 상상하는 가장 끔찍한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을 한참 위에서 바라보고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또 100미터가 아닌, 500미터, 1000미터는 어떨까요? 내가 경험하는 두려움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별 다를 것 없는 수억 가지 일 중 하나라면, 그리고 이 끔찍한 시간이 내 삶 전체에서 보면 찰나의 아주 짧은 점 같은 순간이라면요?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 과연 이 걱정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기억들 중에서 기억이나 나려나요. 눈앞의 걱정을 가벼이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걱정과 염려는 우리의 시야를 좁아지게 만듭니다. 반면 불안 체계의 힘은 광범위하게 작동하며, 애쓰지 않으면 순식간에 불안이 우리의 삶 전체를 집어 삼켜 버립니다. 우리는 불안 안에서 허우적대기보다 불안의 밖에서 불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문제에서 몇 걸음 떨어져 삶의 영역과 시야를 넓히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유전자는 틈만 나면 우리를 아주 좁은 삶과 시야에 가두려 하니까요. 생과 사에 대한 불안을 한 발짝 떨어져 관찰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우리는 죽음을 피하기보다 오히려 기억해야 합니다. 두려운 감정을 자주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을 아주 좁은 현재의 순간에 두기보다, 넓고 긴 삶의 영역에 두어보아야 합니다. 삶은 유한하기에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두려움이 우리가 가진 눈 앞의 문제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지금 고민하는 바로 그 문제는 언젠가는 나를 지나갈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빛이 바랠 것입니다. 그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든, 아니면 그저 지나가게 내버려 두든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끝을 향해 달려갑니다.
무엇이 나에게 더 도움이 되는 태도일까요? 결국 내가 마주하는 삶의 문제는 내가 내릴 선택과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그 문제를 꼭 붙잡을 것인지, 아니면 몇 발자국 떨어져 그 문제들을 다루어 갈 것인지 하는 선택 말이지요. 우리의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 탄생이 입혀준 죽음의 옷을 영원히 벗어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면, 내가 ‘중요하다’ 여겼던 것들 중 꽤 많은 것을 솎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방심하고 있으면, 마음은 자동적으로 눈 앞의 문제에 어떻게든 온 힘을 쏟으려 합니다. 그러니 애를 좀 써야 합니다. 이럴 때는 늘상 경험하는 삶의 영역 밖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경험이 도움이 됩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시도나, 가보지 않았던 낯선 곳으로 여행 같은 것들이지요. 거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매일 되풀이되는 출근길을 조금 돌아가 본다든지, 늘 고민만 하고 지나가던 빵집에 들러보는 식의 소소한 일탈이 우리를 둘러싼 껍질이 깨어지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커피를 사가기만 했던 카페의 창가 자리에 10분만이라도 앉아 고즈넉한 느낌을 음미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낯선 것에 대한 불편함이 꽤 괜찮은 경험으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이 두려움이 아닌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인간의 뇌는 항상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 성장합니다. 기존의 뇌가 가지고 있던 신경회로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재조직되고 , 혹은 새롭게 생성이 되기도 합니다. 기존에 이미 형성된 회로는 우리의 좁은 시야와 같아요. 경험을 넓은 시야에서 보려는 노력, 생소하고 불편하지만 즐거운 경험들이 우리 마음과 삶의 테두리를 조금씩 더 넓혀줄 수 있습니다. 맞아요,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신이 고민하는 그 문제는 삶이 흘러가는 긴 맥락 안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