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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나의 과녁을 부쉈다.”
문경민 작가가 부순 과녁, 그리고 도약
_양궁에는 양궁의 서사가 있는 거죠. 숨조차 멈추게 만드는 양궁 특유의 긴장감이.
양궁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스포츠이지만 그동안 동화에서는 만나 보지 못한 종목입니다. 양궁이라는 소재를 떠올리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숨 참고 슛오프』의 출발점이기도 한 『용서할 수 있을까』를 쓸 때였습니다. 처음부터 스포츠 동화를 쓰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학교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분명했고요. 예상은 했지만 쉽지 않았어요. 학교폭력이라는 게 너무 어둡고 무겁잖아요. 읽는 사람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래서 무언가를 함께 넣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함께 넣어야 할 것으로 스포츠를 선택하게 된 건 우연에 가까웠습니다.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었는데, 노트북 화면에 양궁 뉴스가 뜬 거예요. 무심코 클릭했는데 이상하게 계속 더 찾아보게 되더라고요. ‘이거 괜찮은데?’ 양궁에 대해 알아볼수록 그 운동의 성격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상대와 직접 싸우지 않는다는 점, 공정하다는 점, 결국 나 자신과 과녁을 상대하는 운동이라는 점이 좋았습니다. 운동을 하는데 숨을 헐떡이지 않는다는 것도 좋았고요. 양궁을 직접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는데요, 여건이 되지 않아서 시도도 못 했어요. 아쉽긴 했습니다. 제게는 어떤 운동을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흔치 않은 일이거든요.
작가님은 현직 교사이기도 하시고, 학교에서 학교폭력 책임교사 역할도 하고 계시지요. 학교폭력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숨 참고 슛오프』의 주인공 다희와 영서와 봉식은 학교폭력을 경험합니다. 불쾌한 이 경험의 양상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그 일이 모두 이들을 지나간다는 점은 같아요. 아프고 힘들었으나 결국은 지나가게 되는 일로 학교폭력을 다루고 있어요. 초등학교에서 학교폭력 책임교사를 맡아 온 지 올해로 8년째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계속하고 있어요. 이 일이 저와 잘 맞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잘하고 싶어요. 세상에는 우리가 어찌할 수도 없고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가득하지만 학교는 다릅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지켜 줄 수 있고 더 많은 어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지도할 수 있어요.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학교폭력은 예방이 가장 중요해요. 아예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게 제일 좋죠. 다만 문제가 일어났다면 제대로 해결하고 그 일을 지나 보내게 해야 합니다. 저는 아이들을 돌보고 지켜 주는 게 좋습니다.
작품 속에서 다희는 ‘도약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이 작품을 쓰며 작가님만의 ‘도약의 순간’이 있었을까요?
지난 일들이 떠오르면서 웃음이 나네요. 도약의 순간이 있었죠. 그것도 세 번이나요. 첫 번째는 『용서할 수 있을까』를 조금 고쳐 개정판을 내려던 계획을 내려놓았을 때입니다. 『용서할 수 있을까』는 2018년 즈음의 학교폭력 상황을 반영한 이야기였어요. 2026년의 상황에 맞춘 이야기로 고칠 계획이었는데 막상 손을 대고 보니 이야기 자체가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고민 끝에 양궁 소재만 끌어와 새 작품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용서할 수 있을까』는 절판했어요. 그것이 첫 번째 도약의 시점이었죠. 두 번째는 분량을 줄였을 때였습니다. 『숨 참고 슛오프』의 초고는 520매에 달하는 이야기였어요. 이런저런 과정 끝에 분량을 줄이는 방향으로 원고를 수정하기로 했습니다. 350매 정도로 맞추기로요. 자그마치 30%가 넘는 분량을 줄이기로 한 거죠. 그러려면 인물을 덜어 내야 해요. 고치면서 주인공의 할아버지와 영서의 동생을 뺐습니다. 사건과 배경도 함께 조정해야 했죠. 처음부터 다시 쓰는 거나 다름없는 작업이었어요. 고생스러운 과정이었는데 결과물을 보니 마음에 듭니다. 고치는 것과 다시 쓰는 건 언제나 옳구나,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도약은 어찌 보면 원고와는 무관해요. 『숨 참고 슛오프』의 주인공 이름을 고치는 것이었어요. 원래 이름은 ‘세희’였습니다. 지금은 ‘다희’고요. 작가의 말 교정할 때 고쳤어요. 세희는 전작 『열세 살 우리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등장인물입니다. 『열세 살 우리는』에서 세희의 이야기를 충분히 풀지 못했어요. 아쉬움이 많이 남아서 이번 작품에서는 세희의 사정을 출발점으로 잡았습니다. 그런데 쓰면 쓸수록 제가 생각했던 세희와 점점 멀어지더라고요. 분량을 줄이면서는 아예 다른 인물이 되어 버렸고요. 그래도 끝까지 세희를 붙들었는데 작가의 말을 수정하다가 ‘이제 그만하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탁, 끊는 느낌으로 주인공의 이름을 바꿨습니다. 마음이 아렸어요. 다희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 다정하게 들려서 더 좋았고요. 꼼꼼히 고친다고 고쳤는데 마지막 수정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책에 ‘세희’라는 이름이 한 군데 남아 있습니다. 인쇄된 책에 들어간 그 이름을 발견한 순간에는 땀이 났는데요, 그 실수가 어쩐지 애틋하기도 했어요.
다희, 영서, 봉식 모두 자기만의 사연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입니다. 어떤 인물을 그릴 때 가장 이입이 많이 되셨나요? 가장 애틋하고 마음이 가는 캐릭터가 있을지요.
고르기 어렵네요. 모두가 다 좋았거든요. 저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요. 도희성 코치님, 다희 엄마와 아빠, 봉식의 엄마는 좋은 사람들이죠. 그들을 생각하면 내가 이런 사람이 되고 싶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학생들을 품고 돌보고 따듯하게 대하는 어른, 동료들을 잘 돕는 교사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요 인물 중에는 봉식이 가장 좋았어요. 다희와 영서도 당연히 좋았지만 봉식의 태도는 다희에게도 영서에게도, 그리고 저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봉식이 등장하는 장면을 쓸 때는 기분이 막 좋아졌습니다. 저는 ‘야성’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날 것, 거친, 불안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명력이 넘치는 단어, 야성. 다희와 영서와 봉식의 야성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어요. 제가 우리 반 아이들에게서도 발견하고 다희와 영서와 봉식에게서도 발견하는 그것이 다음 이야기에도 깃들 것 같아요.
작가님의 전작들처럼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동시에, 이번 작품에서는 후반부 결승전 장면의 긴장감이 압도적으로 다가옵니다. 양궁 경기를 그리기 위해 따로 공부하거나 찾아본 내용 등이 있을까요?
그러다 알게 된 양궁만의 매력이나 특징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제목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저는 운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초등학교 체육 수업을 할 수 있는 딱 그 정도가 저의 운동 체력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 스포츠 경기가 거의 없을 거예요. 그런 제가 스포츠를 중심 소재로 삼은 어린이 소설을 쓴 거죠. 양궁 선수들의 인터뷰 영상을 많이 찾아봤어요. 자기 일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어떤 눈빛인지, 어떤 태도인지, 동료에게는 어떤 식으로 말을 건네는지 살폈습니다. 그분들이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을 따로 기록했어요. 경기 동영상도 많이 봤고요. 많이 보다 보니 조금은 알 것 같았어요. 어떤 점이 이 스포츠의 매력인지를요. 스포츠 경기는 하나의 서사이기도 해요. 양궁도 마찬가지고요. 종목별로 서사가 풀리는 방식이 다른 것 같아요. 양궁에는 양궁의 서사가 있는 거죠. 좋았어요. 숨조차 멈추게 만드는 양궁 특유의 긴장감이. 『숨 참고 슛오프』라는 제목은 출판사에서 제안한 제목이에요. 저는 『슈팅라인』이라는 가제로 이 원고를 생각해 왔어요. 처음에 편집자님으로부터 지금의 제목을 듣는데 ‘응? ’하는 느낌이었어요. 나중에 좀 더 이야기해 봐야지, 하면서 일단 알겠다고 했는데 막바지가 되니 지쳐서 더 나은 제목이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숨 참고 슛오프』가 ‘슈팅라인’보다 감정적이고 역동적이어서 더 좋았던 건 분명했고요.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제목을 생각하는데 얕게 내쉬던 숨마저 멈추는 그 순간이 그려지더라고요. 그런 순간을 잇고 이어 승부를 가르는 것이 양궁의 서사, 양궁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이미 나의 과녁을 부쉈다.”라는 대사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님도 작가님만의 과녁을 부쉈을까요?
후련해요. 몇 해 동안 답답했던 것이 풀린 기분입니다. 저는 요즘 예전에 냈던 작품 중 만족스럽지 않은 작품을 절판하고 새로 쓰는 작업을 이어 가는 중입니다. 그 시도의 첫 결과물이 『숨 참고 슛오프』예요. 『용서할 수 있을까』를 절판하고 『숨 참고 슛오프』를 낸 거죠. 더 나은 모습으로요. 예전에는 책을 내고 나면 여러모로 불안했는데요, 『숨 참고 슛오프』를 출간하고 나서는 좀 다르더라고요. ‘잘 끝냈구나. 다행이다. 고맙다.’ 하는 마음입니다. 끝내고 나니 새 힘이 충전된 것 같아요. 나는 이미 나의 과녁을 부쉈다,는 문장을 쓸 때의 기분이 떠오르네요.
마지막으로 『숨 참고 슛오프』로 만나게 될 독자 여러분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얼마 전에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문득, ‘쓰는 일을 안 하면 뭘 하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쓰는 게 힘들긴 한데, 안 하면 허전할 것 같았어요. 이 일이 제 삶의 일부가 되어 버렸더라고요. 일보다는 건강이 중요한데 말이죠. 『숨 참고 슛오프』는 3년 만에 세상에 내놓는 어린이 소설입니다. 많은 독자의 사랑을 얻기를 바라지만 결과는 알 수 없죠. 작품은 잘 완성했어요. 이만하면 됐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판단을 받을 차례입니다. 이 이야기가 여러분들의 마음에 즐거움과 애틋함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다희와 영서와 봉식을 여러분들 곁으로 보내드립니다. 잘 부탁드려요. 저는 그 친구들이 무척 좋았거든요.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스포츠는 무엇일까? 축구 혹은 야구? 세계적인 선수를 배출한 배구나 피겨스케이팅도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종목이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중에게 ‘필승’과 ‘공정’의 아이콘으로 사랑받는 스포츠는 바로 ‘양궁’일 것이다. 『훌훌』 『열세 살 우리는』 『스카이다이빙』 등으로 어린이, 청소년이 마주한 삶의 무게를 묵직한 리얼리즘으로 풀어내어 온 문경민 작가가 양궁을 소재로 한 동화 『숨 참고 슛오프』로 돌아왔다. “양궁은 과녁과 나의 싸움이야. 운이 따라 줘야 할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공정해. 나는 양궁이 과녁과 승부를 보는 스포츠라서 마음에 든다.”
과연 작품 속 어린이들은 저마다 어떤 과녁을 마주하며 활시위를 당기고 있을까? 과녁 너머 흔들리는 어린이들의 마음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자 한 문경민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어떤 과녁을 마주하게 되었을까?

시대의 상처에 걸맞은
회복과 생존의 서사
_너른 세상의 밭에 삶도 죽음도 흩뿌려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자를 잘라 다시 심으면 감자가 되는 것처럼,
우리는 그걸 죽음이라고 부르고 삶이라고 부르는 것뿐이지 않을까 하고 소설을 쓰면서 어렴풋이 생각했습니다.
이야기 속 삶과 죽음은 끊임없이 함께 등장합니다. 주경의 죽음, 구제역으로 인한 동물의 죽음 등 여러 죽음 속에서 아이들의 생이 이어지는 부분에서 삶과 죽음이 마치 동전의 양면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 ‘죽은 사람의 흰 뼈를 태운 재’ 같이 환한 어떤 사실, ‘양수’를 연상시키는 비린내 등 삶과 죽음을 비유하신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님은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작품을 쓰시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특별히 더 고찰하거나, 생각이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저도 아직 다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죽어보지 않아서요.(웃음) 삶과 죽음의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직선의 과정이거나 시작과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너른 세상의 밭에 삶도 죽음도 흩뿌려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농사는 매일 죽고 매일 살아나는 일입니다. 그 안에 계절이 있고, 순환이 있고, 삽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이 동일하다고도 같은 크기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감자를 수확하면 크기나 모양이 제각각인 것처럼요. 감자를 잘라 다시 심으면 감자가 되는 것처럼, 우리는 그걸 죽음이라고 부르고 삶이라고 부르는 것뿐이지 않을까 하고 소설을 쓰면서 어렴풋이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계속 이어지는 일인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먹는 것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옵니다. 썩은 감자를 먹고 탈이 나고, 멸치만으로 허기를 달래던 아이들은 구순태를 만나 집밥을 먹고, 제철 채소를 맛봅니다. 그리고 세 주인공은 아이들처럼 끊임없이 치킨과 빵 같은 도시의 음식을 상상하고 열망하기도 하죠. 작가님은 작품 속 농경사회를 살고 있는 이 네 사람과 한 밥상에 앉는다면 어떤 음식을 어떻게 나눠 먹고 싶나요? 그 식사 자리에는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합니다.
농사를 지으면 참이라는 것을 먹습니다. 일하다 중간에 먹는 음식인데요. 다 같이 둘러앉아 일하다 말고 먹는, 국수일 때도 밥일 때도 있는데요. 반찬 가짓수가 별로 없어도 그게 기가 막히게 맛있습니다. 밥이 달아요 달아. 그건 일을 한 다음에 다 같이 먹는 음식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물론 약간의 음주도 곁들이지요. 그렇게 푸지게 먹고 오전 내 일한 논과 밭을 바라보면서 다시 일을 준비하는 참. 그 참을 같이 먹고 싶습니다. 소설이 책으로 나오고 페이지마다 고랑을 넘기며 초보 작가가 초보 농사꾼처럼 참을 기다리는 마음에 군침이 싹 돌고 다 먹고 나면 오늘 못 쓴 것은 내일 더 쓰자는 마음이 차는. 소설 속 선지, 문복, 나, 구순태와 함께 문장과 문장 사이 그 고랑에 앉아 참을 참! 맛있게 먹고 싶습니다. (만약 2쇄를 찍는다면요. 제발! 멕시코 치킨에 사라다를 계속 리필하면서 맥주를 마시고 싶기도 합니다.^^)
이 소설을 꼭 읽어 주었으면 하는 독자가 있다면 누구인가요?
이 소설을 처음 구상할 때 농촌에 대해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다루어지는 방식, 치유나 힐링, 서정과 목가의 낭만성에 대해 반감이 있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그렇게 평온하고 아름답기만 한 곳은 없다고요. 쓰는 동안에도 내내 시골이나 전경이나 인정 같은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쓰는 동안 인물들이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더라고요. 종일 피를 뽑고 나서 우는 문복에게 구순태가 하는 말에서, 우리 아직 늦가을이라고 말하는 초로의 노인에게서, 갓 짜낸 들기름 냄새 같은 것에서 예상하지 못한 어떤 위로가 생겨났습니다.
“이제 다 했냐? 할 만큼 해 봤냐? 이제 후회도 미련도 없냐?”
어찌할 수 없음 앞에 있는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어주면 어떨까 했습니다. 끝내 해결되지 않는 일도 있고, 붙잡을 수 없는 마음은 늘상 있는 일이니까요. 그럴 때 누군가 무심하게 이런 말을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놔둬라, 너도 저것들도!”
이 한 해를 지나보낸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에필로그가 짧게 등장합니다.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아이들의 뒷이야기를 더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선지는 기도원을 다시 일으켰을까요? 나는 영농 후계자가 됐을까요? 문복은 어떤 오지에서도 돌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됐을까요? 저도 가끔 생각해 봅니다. 소설 속에서 보호종료 아동이 된 내가 기도원을 나가기 전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결혼을 하면 좋겠고, 나무를 만지는 일을 하면 좋을 것 같고, 아주 작은 아이의 의자 하나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에 대해 문복은 솜사탕 같은 말이네, 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여전히 솜사탕 같은 말일까요? 그런 꿈조차 녹아 사라지고 없어지는 현실이 조금은 나아졌으면 하고 바랍니다. 누구에게나 평범과 일상이 가장 무서운 말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후덕하게 나이가 들어 일 년에 한 번쯤 장마철 논물처럼 불어난 가족들을 데리고 한자리에 모였으면 합니다. 죽음의 빚 같은 것 없이 계곡 옆 닭백숙집에서 실한 닭다리를 서로에게 내밀었으면 합니다. 거창한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함께할 밥상 하나쯤은 가진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작품은 소한, 우수, 입하처럼 절기로 목차가 구성되었고, 각 챕터는 다시 단어와 그에 얽힌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가님의 집필 과정이 궁금합니다. 절기와 단어가 먼저 떠올라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셨을까요?
아니면 이야기를 쓰다 보니 절기가 맞아떨어졌나요? 전반적인 집필 과정이 궁금합니다.
농협에서 나눠 주는 달력이 있습니다. 숫자가 크고 그림이나 사진도 없이 직관적인 달력입니다. 음력 표기가 있고 절기가 나와 있는 달력인데, 아이돌 달력이나 무한도전 달력만큼 인기가 많습니다(정말요^^). 연말이면 이 달력을 받으러 가는 일이 중요한 행사처럼 느껴집니다. 꼭 그 달력이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농사 달력을 보며 자랐습니다. 이야기를 구상했을 때도 계절과 생장의 시간 감각이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뼈대가 될 목차를 자연스럽게 우리가 익숙하게 쓰는 양력이 아니라 음력과 절기로 떠올렸습니다. 절기를 설명하는 문장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우리는 왜 이런 리듬을 잊은 채 몇 월 며칠이라는 단조로운 시간 속에서 살아갈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계절을 감각하며 생의 리듬을 따라 살아갈 수도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자 쓰려던 이야기가 더 생생하게 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농사 달력을 보고 자랐듯이 농사 달력 속 절기를 따라 소설도 자랐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은 ‘기도원’에서 자랍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이 아이들은 ‘어머니’를 섬기며 무릎을 꿇고 하염없이 기도하거나 울고, 벌을 받고, 기도로 로또 번호를 알아내라는 명령에 숫자를 읊기도 합니다. 세 아이가 만나는 공간으로 기도원을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누군가 이 소설을 리틀 포레스트 지하 버전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기도원의 절망이 농경 사회로 이어지는 이야기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는 구원될 수 있을까?’라는 소설의 질문을 좀 단순하고 보편적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기도원은 이런 질문을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큰 욕망이 있고 그건 극단적이고 맹목적이고 거대한 자본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도원을 나와 농경 사회로 들어가 인물들이 지금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멀리서 보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질문하고 싶었습니다. 성장이라는 것이 반드시 크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작게 여러 갈래로 천천히 뻗어 나가는 것에 가까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로 질문을 바꾸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바로 ‘농사’, ‘농경’입니다. 감자를 심고, 완두콩을 심고, 여러 어려움을 겪지만 끝내 수확해 내는 정직한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졌는데요. 농사와 농경이 이야기의 큰 줄기가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불조심 포스터나 미래의 모습에 대해 그리기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시절 저는 집에 불이 날까 걱정했습니다. 저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무섭고 현실적인 걱정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미래는 너무 멀어서 빈약한 상상력으로 하늘을 나는 자동차, 바닷속에 지어진 아파트, 거리를 청소하는 로봇 같은 것을 그렸습니다. 미래는 멀었지만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미래에 대해서 불안하고 불행한 모습, 무기력하게 파괴되는 어두운 모습을 먼저 떠올리는 것 같더라고요. 미래가 불안한 아이들을 먼 농경 사회로 데려가 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과거의 인류는 우리를 상상했을까요? 그들의 미래가 지금의 우리라면, 우리는 그 기대에 응답하고 있는 걸까요? 이런 질문 앞에서 오래된 과거로 가고 싶었습니다. 지금의 아이들은 매일 밥을 먹지만 쌀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르잖아요. 이삭과 모와 벼와 그루터기가 한 몸이라는 것도요. 아이들을 데리고 논밭으로 가서 땀 흘리는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 잊힌 생존의 기술, 살아있는 리듬, 함께 사는 감각을 같이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를 심고, 잡초를 뽑고, 계절을 견디며 스스로를 길러냅니다. 농사라는 가장 오래된 기술로 문명을 다시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드는지. 기술이 아닌 삶의 방식으로요. 설령 그 질문이 해결되지 않는다 해도요.
“짐승의 내장 같은” 산길을 달리는 오래된 다마스. 여기에는 기도원에서 만나 함께 자란 세 아이가, 죽은 친구가 남긴 땅으로 차를 몰고 있다. 트렁크에는 그 친구를 죽게 만든, 정확히는 그렇게 만들었다고 믿고 있는 한 남자가 결박된 채로 실려있다. 이들이 향하는 땅은 아이들을 어둠에서 구원해 줄 수 있을까. 『우리들의 농경 사회』는 닭이 알을 품는 12월의 소한을 지나, 범이 교미를 시작한다는 11월의 대설까지 1년의 절기를 꼭꼭 씹어 먹으며 마침내 살아내는 소설이다. 아이들은 삽을 들어 과거를 묻은 땅 위로, 깻잎을 심고, 감자를 키워 나간다. 제3회 〈연세-박은관문학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공통 감각이 사라져 가는 이 시대의 상처에 걸맞은 회복과 생존의 서사를 보여줌으로써 구원의 의미를 탐색했다”는 평을 받았다. 어디로 발을 내디뎌야 할지 혼란스러운 이들에게, 일찍 삶의 고난을 겪어버린 아이들이 땅 위에서 땀 흘리며 성장하는 모습이 하나의 생생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