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AE QUARTERLY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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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현의 마음을 살피는 기술
불확실한 시대,
우리는 왜 '정답'을 빌리고 싶을까
: 사주와 MBTI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요즘은 처음 만난 사람과 어색함을 풀 때 이 질문만큼 무난한 것도 없습니다. 상대가 "저는 I예요"라고 답하면 왠지 그 사람을 한 뼘쯤 알게 된 기분이 들고, 같은 유형이라는 걸 발견하면 금세 반가워집니다. 이직이나 결혼처럼 큰 결정을 앞두고 사주나 타로를 찾아보는 일도 낯설지 않습니다. 점집에 발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휴대전화만 켜면 올해의 운세와 궁합, 나의 성격을 몇 분 만에 받아볼 수 있는 시대니까요.
대부분은 "그냥 재미로 보는 거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좋은 말을 들으면 마음이 놓이고, 좋지 않은 풀이를 들으면 며칠이고 은근히 신경이 쓰입니다. 재미라고 하기엔 꽤 오래 남고,
믿는다고 하기엔 좀 머쓱한 이 애매한 끌림.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앞날을 모른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입니다
사람은 불확실함 앞에서 쉽게 불안해집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아무리 애써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을 때 그 불안은 한층 커집니다. 취업, 이직, 건강, 자녀 문제, 인간관계처럼 삶의 중요한 일들은 노력만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선을 다해도 어긋나고, 별생각 없이 한 선택이 뜻밖의 결과를 부르기도 하지요.
이럴 때 사주나 운세는 복잡한 현실에 임시로 선을 그어줍니다. "올해는 이동할 때가 아니다", "가을쯤 기회가 온다"는 말은 맞고 틀리고를 떠나, 흔들리던 마음을 잠시 한곳에 붙들어 둡니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생기고, 일이 잘못되더라도 모든 책임을 혼자 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따라옵니다. 그러니 사주를 찾는 마음을 미신에 약한 태도라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 안에는 "앞으로 괜찮을까", "내가 잘못 선택하면 어쩌지"라는, 누구나 한 번쯤 품어본 두려움이 있습니다. 세상이 예측하기 어렵게 느껴질수록 사람은 어디에든 질서가 있다고 믿고 싶어집니다. 정답이 정말 있어서가 아니라, 정답이 있다는 느낌이 필요해지는 것이지요.
사주가 미래만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지나온 삶에 하나의 이야기를 붙여주기도 합니다. 힘들었던 시기를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원래 변화가 많았던 때"라고 설명받으면, 견뎌온 시간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집니다. 사람은 사실만큼이나,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필요로 하니까요.
네 글자가 나를 설명해 주는 순간
MBTI가 유독 사랑받는 이유는 결이 좀 다릅니다. 누구나 자신을 알고 싶어 하지만,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또렷이 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낯을 가리지만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이 많고, 계획을 좋아하면서도 가끔은 충동적으로 움직입니다.
공감을 잘할 때도 있지만, 일이 급하면 상대의 마음보다 해결책부터 찾기도 합니다. 성격이란 이렇게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한마디로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MBTI는 그 복잡한 모습을 네 글자로 정리해 줍니다. "나는 I라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 "저 사람은 T라서 해결책부터 말한 거야" 이렇게 표현하면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라는 안도감도 생기지요. 서로 다른 방식을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성향의 차이로 받아들이게 해준다는 점에서, MBTI는 꽤 쓸모 있는 대화의 도구이기도 합니다.
직장에서는 특히 편리합니다. 회의에서 바로 의견을 내는 사람과 충분히 생각한 뒤 말하는 사람, 구체적인 자료를 중시하는 사람과 큰 방향부터 보는 사람. 그 차이를 성향으로 설명할 수 있으니까요. 서로를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만 "그 사람은 원래 F라서 그래", "J니까 융통성이 없어"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려버리면, 이해를 돕던 말이 사람을 재단하는 칼로 바뀝니다. 유형을 알기 전에는 보이던 한 사람의 사정과 맥락이, 네 글자 뒤로 사라져버릴 수 있습니다.
내향적인 사람이 모든 모임을 싫어하는 건 아니고, 사고형이라고 감정이 메마른 것도 아닙니다. 같은 사람도 직장에서는 신중하고 집에서는 즉흥적일 수 있습니다. 성격은 상황과 관계, 맡은 역할에 따라 달라집니다. 네 글자는 나를 비추는 한쪽 창문이지, 집 전체의 평면도가 아닙니다.
왜 이렇게 잘 맞는 것처럼 느껴질까
사주나 성격 풀이를 읽다 보면 "어떻게 나를 이렇게 잘 알지?"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따져 보면 이유는 단순합니다.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상처를 잘 받는다",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지만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다" 이런 문장은 사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그런데 내 생년월일이나 검사 결과와 함께 제시되면 유독 나만을 위해 쓴 말처럼 들리지요.
맞았던 말은 오래 기억하고, 빗나간 말은 쉽게 잊는 경향도 한몫합니다. "올해 인간관계를 조심하라"는 말을 들은 뒤 누군가와 다투면 그 풀이가 떠오르지만, 별일 없이 지나간 수많은 날은 세어보지 않습니다. "역시 나는 이 유형이야"라고 느끼게 하는 행동은 눈에 잘 들어오고, 유형과 맞지 않는 모습은 그날의 예외로 넘기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작용입니다. 문제는 해석을 사실로 굳히는 순간부터입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은 자기 이해의 표현 같지만, 때로는 변하지 않아도 되는 핑계가 됩니다. "P라서 계획을 못 세워", "궁합이 나쁘니 이 관계는 오래가기 힘들어", "올해는 운이 없으니 도전은 접어두자"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사이에 가능성은 조금씩 좁아집니다.
참고가 판결문이 될 때
사주나 MBTI를 보는 일 자체가 나쁘지는 않습니다. 가볍게 즐기고, 자신을 돌아보는 질문으로 삼는다면 삶에 작은 재미와 위안을 줍니다. 힘든 시기에 "조금만 더 지나면 나아질 거야"라는 말 한마디에 버틸 힘을 얻는 경험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다만 참고가 판결문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람을 만나기도 전에 궁합부터 확인하고, 검사 결과만으로 동료를 판단하고, 중요한 결정을 운세에 맡기기 시작한다면, 삶의 운전대가 조금씩 손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채용, 이직, 결혼, 투자, 치료처럼 무게가 큰 결정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성격 검사나 운세가 생각할 거리를 줄 수는 있어도, 한 사람의 능력이나 관계의 미래를 대신 결정해 주지는 못합니다.
내가 지나치게 기대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결과를 보지 않으면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지, 좋지 않은 풀이를 들은 뒤 일상이 흔들리는지, 안심하려고 같은 질문을 여러 곳에서 되풀이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한 번 보고 웃으며 넘길 수 있다면 그것은 취향입니다. 하지만 더 확실한 답을 찾아 계속 확인하면서도 불안이 줄지 않는다면, 잠시 거리를 두는 편이 좋습니다.
정답 대신 나침반을 갖는다는 것
사주와 MBTI를 건강하게 활용하는 법은, 결과를 답이 아니라 질문으로 바꾸는 데 있습니다. "나는 내향형이니까 사람을 피해야 해"가 아니라 "나는 어떤 만남 뒤에 지치고, 어떤 관계에서 힘을 얻는가"를 묻는 것. "올해는 이직운이 없다"는 말에 멈추기보다 "내가 이직을 망설이는 현실적인 이유는 무엇이고, 지금 준비할 수 있는 건 뭘까"를 살피는 것.
중요한 선택 앞에서는 객관적인 정보, 그간의 경험, 믿을 만한 사람의 조언, 그리고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함께 놓고 봐야 합니다. 어떤 설명을 접한 뒤 선택지가 넓어지는지 좁아지는지도 돌아볼 일입니다. 결과와 다른 선택을 할 자유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참고입니다. 결과가 명령처럼 느껴진다면, 자기 이해라기보다 불안을 피하는 수단에 가까워진 것일 수 있습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 바깥의 확신을 빌리고 싶어지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확신을 잠시 빌리는 것과 삶의 방향을 통째로 맡기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의 성격은 네 글자보다 넓고, 삶은 몇 줄의 운세보다 많은 변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살다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필요한 건 미래를 정확히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모르는 부분을 조금 남겨둔 채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쪽으로 한 걸음 내딛는 힘일지도 모릅니다. 사주와 MBTI는 나를 들여다보는 작은 창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창밖에 보이는 풍경이 세상의 전부는 아닙니다. 결국 삶을 만들어가는 것은 이미 정해진 설명이 아니라, 불확실함 속에서도 오늘 내가 내리는 선택입니다.
약력
정신과 전문의 신재현 원장은 현재 강남푸른정신과를 운영 중이다. 계명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으며 인지행동치료, 불안장애치료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저서로는 ‘나를 살피는 기술’, ‘어른의 태도’ 등이 있으며 따뜻하고 진정성 있는 상담을 통해 환자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