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현의 마음을 살피는 기술

대꾸하지 않기로 한 날, 

그래도 남는 감정에 대하여

얼마 전 SNS에서 한 직장인의 글이 화제가 됐습니다. "오늘 회의에서 또 깎아내리는 말을 들었다. 참았다. 근데 퇴근하고 샤워하다가 울었다." 짧은 글이었지만 댓글은 수천 개가 달렸고, 대부분이 "나도요"였습니다. 직장에서, 혹은 피할 수 없는 자리에서 무례한 사람을 마주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대놓고 비아냥거리거나, 은근히 깎아내리거나, 말끝마다 불쾌한 뉘앙스를 깔아 놓는 사람. 그 자리에서는 동급이 되기 싫어서, 품위를 지키고 싶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이불 속에서 문득 그 장면이 떠오르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그때 한마디 했어야 했나?" "왜 나만 참아야 하지?" 대꾸하지 않은 건 분명 내 선택이었는데, 그 선택이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왜 무례함은 이렇게 오래 남을까

우리 뇌는 위협적인 자극을 오래 기억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원시 시대의 뇌에게 누군가의 적대적인 태도는 곧 생존의 위협이었고, 그래서 부정적인 경험은 긍정적인 경험보다 훨씬 강하게, 오래 각인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부정 편향(negativity bias)이라고 부릅니다. 하루 종일 열 사람에게 좋은 말을 들어도, 한 사람의 무례한 말 한마디가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게다가 직장처럼 매일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환경에서는 이 자극이 반복됩니다. 한 번의 무례함이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고, "내일도 저 사람을 봐야 한다"는 예기 불안까지 더해지면서 스트레스가 만성화되기 쉽습니다.

특히 한국의 직장 문화에서는 이 문제가 더 깊어집니다. 연차와 직급이 발언의 무게를 결정하는 구조에서, 윗사람의 무례함은 “원래 그런 스타일”로 포장되기 쉽고, 아랫사람의 불쾌함은 “너무 예민한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입니다. 회식 자리에서 불쾌한 농담을 들어도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 웃어넘기고, 회의에서 인격 모독에 가까운 지적을 받아도 “지금 여기서 반박하면 조직 생활이 힘들어진다”라는 계산이 먼저 돌아갑니다. 무례함 자체도 고통이지만, 그것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까지 겹치면서 사람의 마음은 이중으로 짓눌립니다. 결국 “참는 게 이기는 거다”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되뇌지만, 참을수록 몸과 마음은 점점 무거워지기만 합니다.

참는 것과 흘려보내는 것은 다릅니다

많은 분이 무례한 상황에서 '참는 것'과 '흘려보내는 것'을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둘은 심리적으로 완전히 다른 과정입니다. 참는다는 것은 감정을 느끼되 억누르는 것입니다. 분노와 억울함은 그대로 있는데, 겉으로만 표현하지 않는 상태죠. 이렇게 억눌린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안으로 곪습니다. 두통이 생기고, 잠이 안 오고, 사소한 일에 짜증이 폭발하는 식으로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옵니다. 반면 흘려보낸다는 것은, 그 상황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를 조절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무례한 건 저 사람의 문제이지, 내 가치와는 관계없다"는 인식이 자리 잡을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무례한 사람의 말이 사실이 아닌 이유

진료실에서 직장 내 대인관계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분들에게 자주 드리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이 당신을 정확하게 묘사한다고 생각하세요?" 대부분은 잠시 생각하다가 "아니요, 그건 아닌데…"라고 대답합니다. 무례한 사람의 말은 대부분 상대의 객관적인 모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불안과 불만을 투사한 결과입니다. 자신이 느끼는 초조함, 열등감, 통제욕이 공격적인 언어로 바뀌어 가장 만만해 보이는 대상을 향해 발사되는 것이죠. 그래서 무례한 말에 상처를 받을 때, 그 상처는 '사실이라서' 아픈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아픈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차이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말이 내 안에서 차지하는 무게가 달라집니다.

마음의 방호복을 입는 몇 가지 방법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자리에서 무례한 사람을 마주할 때, 어떻게 하면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먼저, 반응을 선택하는 '틈'을 만드는 연습이 도움이 됩니다. 무례한 말을 들었을 때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속으로 천천히 숨을 한 번 내쉬며 "지금 이 사람의 말에 반응할 가치가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겁니다. 이 짧은 간격이 감정의 자동 반응 회로를 끊어 줍니다.

진료실에서 이 이야기를 드리면 "선생님, 그게 진짜 돼요?"라고 되묻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 환자분이 기억납니다. 매주 팀 회의 때마다 특정 상사에게 면박을 당해 출근만 하면 심장이 빨라진다고 했던 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상사가 그렇게 말할 때, 카메라가 이 장면을 찍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당신은 화면 밖에서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제안했을 때, 그분은 웃으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2주 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회의 때 또 당했는데, 이번엔 좀 달랐어요. '아, 또 저러는구나' 하고 한 발짝 떨어져서 보게 됐어요. 물론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예전처럼 밤새 끓어오르지는 않더라고요." 인지행동치료에서 '관찰자 시점'이라 부르는 이 기법은, 거창한 훈련이 아니라 시선의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 감정의 온도를 내려 줍니다.

퇴근 후에도 그 장면이 반복 재생된다면, 감정을 글로 꺼내 놓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오늘 이런 일이 있었고, 나는 이렇게 느꼈다"라고 짧게라도 적어 보면, 머릿속에서 빙빙 돌던 생각이 종이 위에 내려앉으면서 한결 가벼워집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대를 분석하거나 복수를 계획하는 글이 아니라, 내 감정에 집중하는 글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무례한 사람에게 에너지를 쓴 만큼, 나를 위한 시간을 의식적으로 보충해야 합니다. 좋아하는 음악, 편안한 사람과의 짧은 대화, 가벼운 산책. 빼앗긴 에너지는 스스로 되찾아야 합니다.


회사는 내 인생의 

한 장면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피할 수 없는 자리에서 

만나는 불쾌한 

사람 때문에 

나의 평온함까지 

내어 줄 이유는 

없습니다. 

대꾸하지 않은 나를 칭찬해도 괜찮습니다

무례한 사람 앞에서 침묵을 선택한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왜 한마디 못 했을까" 하고 자책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대꾸하지 않은 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동급이 되지 않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감정에 휩쓸려 똑같이 무례하게 맞받아치는 것보다, 한발 물러서서 상황을 바라보는 쪽이 훨씬 더 많은 힘을 필요로 합니다. 다만 참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그 감정을 건강하게 흘려보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무례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 사람이 내 하루의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으니까요.

회사는 내 인생의 한 장면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피할 수 없는 자리에서 만나는 불쾌한 사람 때문에 나의 평온함까지 내어 줄 이유는 없습니다. 오늘도 참고 돌아온 당신에게 말씀드립니다. 당신의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약력

정신과 전문의 신재현 원장은 현재 강남푸른정신과를 운영 중이다. 계명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으며 인지행동치료, 불안장애치료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저서로는 ‘나를 살피는 기술’, ‘어른의 태도’ 등이 있으며 따뜻하고 진정성 있는 상담을 통해 환자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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