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은 교수의 과학이야기

생명의 기원

Fischer가 폴리펩타이드를 만들던 100년 전에 비하면 화학은 정말 크게 발전했다. 요즘은 자동화된 합성 장치가 있어서 아미노산의 서열(sequence)을 정해주고 버튼을 누르면 원하는 순서대로 아미노산이 붙은 폴리펩타이드가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응을 반복할수록 결함이 누적되는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아미노산을 10개 이상 붙이려고 하면 얻을 수 있는 양이 그만큼 줄어들어서 값이 확 비싸진다. 이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폴리펩타이드 내 아미노산의 개수는 보통 50개 정도를 한계로 본다. 그럼 애초에 자연에서는 몇백 개의 아미노산이 결합된 폴리펩타이드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궁금해진다. 

메탄, 암모니아, 수소, 수증기 등을 포함하여 원시 대기를 모사한 조건에서 번개가 치면 아미노산을 비롯한 유기화합물이 합성되었다는 실험 결과를 배운 적이 있을 것이다. 최근에 보고된 연구 결과로 조그마한 물방울들이 만들어질 때 어떤 물방울들은 양전하를, 다른 물방울들은 음전하를 띠면서 이 둘 사이에서 작은 번개가 튕기는 현상이 유기화합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기여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있다. 이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폴리펩타이드가 만들어지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난이도를 요하는 일이다. 정교한 형상을 띠고 작동하는 단백질 효소들을 보고 있으면 “눈먼 시계공”을 통해 어떻게 이것들이 만들어졌을지 신기하기만 하다. 

일단 반응을 잘 일으키려면,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조건 중의 하나는 반응물의 농도이다. 반응할 분자들끼리 일단 서로 만나야 반응이 일어나든 말든 하기 때문에, 화학 반응의 속도는 반응물의 농도, 즉 단위 부피당 분자 개수와 관계가 있다. 바닷물에 아미노산들이 그냥 멀찍이 녹아 있어서는 반응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기 어렵고, 어떻게든 외부와 구별되는 공간 안에 분자들을 모아 농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세포를 보면 세포막으로 외부와 자신을 구분하고 안에 생명활동에 필요한 다양한 기구들을 모아서 보호한다. 단백질, RNA 등이 빼곡히 북적이는 세포 안에서는 아미노산을 외부에서 받아오거나 새로 만들거나 단백질을 만드는 데 쓰는 등의 활동을 통해 농도를 조절하며, 또한 단백질들을 뭉쳐서 농도가 높은 공간을 부분적으로 만들고 반응을 가속화하는 일도 한다. 따라서 태초에 “원시세포”(protocell)라 불리는 외부와 구별되는 공간이 먼저 만들어지고 점점 진화해서 세포가 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나오게 된다.

섞이거나 섞이지 않거나

뭉친다는 것이 뭔지 좀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물과 기름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고 보통 당연히 생각한다. 그렇다고 물 분자 하나도 기름 층에 들어가지 못하냐 하면 그렇지 않다. 상대 액체에 녹는 양이 무척 적을 뿐이다. 과학적으로 보다 정확한 표현은 “주어진 온도에서 물에 녹는 기름의 양과 기름에 녹는 물의 양은 매우 적어서, 물과 기름을 한 용기에 담으면 거의 순수한 상태로 물 층과 기름 층이 갈라져서 존재한다”가 아닐까 싶다. 각각의 상(phase)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상분리”(phase separation)라 부른다. 엔트로피의 관점에서는 물과 기름이 따로 나뉘어 있는 것보다 섞여 있는 쪽이 물 분자와 기름 분자를 배열할 수 있는 가짓수가 훨씬 많기 때문에 섞이는 것이 무조건 유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섞이지 않는 이유는, 물 분자 입장에서는 자기들끼리 상호작용하는 것이 훨씬 강하고 좋은데 약한 기름 분자를 굳이 끼워줄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달리 표현하면 물 분자끼리 상호작용하는 힘과 기름 분자끼리 상호작용하는 힘의 종류와 세기가 다른 것이다. 

분자들이 서로 끌어당기는 정도는 화학적 성질이 비슷하다면 작은 분자든 큰 분자든 비슷하다. 즉 고분자 사슬을 이루는 반복단위 입장에서 보면 분자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 자체는 큰 차이가 없다. 잡아당기는 힘이 강하고 서로 가까이 붙어 있다면 그 고분자는 필경 높은 온도까지 고체 상태를 유지할 것이고, 약한 비극성 상호작용만 존재하는데 사슬 사이의 거리도 멀다면 상온에서도 흐르는 고분자가 될 것이다.

액체-액체 상분리

세포 안에 단백질을 비롯해 이것저것 채워진 것이 많더라도, 어디에 녹아있는지를 생각하면 용매는 결국 물이다. 원시세포도 비슷하게 물로 채워졌을 것이며, 역시 물이었을 원시 바다 속에서 어떻게든 나뉘어져 나왔을 터다. 가장 유력한 가설 중 하나는 “액체-액체 상분리”(liquid-liquid phase separation)이라 불리는 현상에 토대를 둔다. 소금처럼 이온 성질을 지니는 고분자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사슬을 따라 양전하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면 전하 균형을 맞추어야 하니까 염소와 같은 음이온들이 같은 개수만큼 붙어 있을 것이다. 물론 반대로 음전하들이 사슬에 매달려 있고 양이온들이 같은 개수만큼 있는 고분자도 상상할 수 있다. 이들 각각의 고분자는 소금이 물에 잘 녹는 것처럼 물에 녹아 투명한 용액을 만든다. 그런데 이 둘이 녹아 있는 물을 같은 양만큼 섞으면 뭔가 끈적한 콧물 같은 물질이 만들어지면서 아래로 가라앉는다. 이를 보고 코아세르베이트(coacervate)라 한다. 분명 물에 녹는 고분자 두 종류를 섞었는데 더 이상 물에 녹지 않는 신기한 현상이며, 액체-액체 상분리의 일종이다. 

코아세르베이트가 만들어지는 원리 또한 보통 엔트로피를 이용해서 설명한다. 각 고분자에 붙어있는 짝이온들은 전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고분자로부터 많이 멀어질 수 없다. 그런데 반대 전하를 띠고 있는 고분자가 물 속에 들어오면, 짝이온들은 고분자들끼리 뭉치게 두고 자신들은 물 속에 맘껏 떠다닐 수 있게 된다. 즉 차지할 수 있는 위치의 가짓수가 늘어나니까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따라서 코아세르베이트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코아세르베이트는 고분자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고 상당히 많은 양의 물을 포함하여 부풀어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물 속에서 역시 물을 머금고 있는 채로 상분리되는 코아세르베이트의 성질은 원시 세포가 만족해야 할 조건과 잘 어울린다.

전하간 인력 말고도 다양한 상호작용을 통해 코아세르베이트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최근 연구들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또한 세포들이 유사한 액체-액체 상분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생명 활동을 능동적으로 제어하는 현상 역시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단백질들을 뭉쳐서 농도가 높은 공간을 세포 안에 부분적으로 만들었다가, 일이 다 끝나면 단백질들을 흩어버리는 식이다. “생체분자 응집체”(biomolecular condensate) 또는 “막 없는 세포소기관”(membraneless organelle)이라 불리는 이것들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겼다 없어졌다 하기 때문에 연구하기는 그만큼 어렵지만, 복잡한 생체 기작을 구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특히 “본질적으로 무질서한 단백질”(intrinsically disordered protein)들이 액체-액체 상분리를 일으키는 핵심으로 지목된다. 보통 단백질 하면 3차원 구조가 잘 정의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상당수의 단백질은 구조가 하나로 잘 정해지지 않아서 다양한 형상을 띨 수 있고 따라서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부분들이 서로 뭉치면서 응집체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카이랄성과 생명의 기원

왼손과 오른손은 모양이 같지만 겹칠 수 없는 서로의 거울상이다. 화학에서도 거울상으로 존재하는 분자쌍들이 있다. 탄소 원자는 다른 원자와 공유 결합을 최대 4개까지 형성할 수 있는데, 결합된 작용기들이 모두 다른 경우 서로에 대해 거울 상인 두 개의 화학 구조를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분자는 카이랄성을 띠고 있다고 하며 이들을 거울상 이성질체라 한다. 한쪽 이성질체를 편향하는 조건이 아니라면 보통 합성에서는 거울상 이성질체가 반반씩 섞여 있는 라세믹 화합물이 얻어진다. 그러나 의약품으로 사용할 때는 합성 및 정제 과정에서 반드시 특정한 거울상 이성질체를 선택적으로 얻어 쓴다. 동일한 작용기를 포함하더라도 3차원적 배열이 다른 반대 이성질체는 탈리도아미드와 같이 부작용이 크거나 아스파탐처럼 맛이 다르다. 이는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단백질이 한 종류의 아미노산 이성질체만으로 이루어져 있어 거울상 이성질체의 차이를 인지하기 때문이다. 

가장 단순한 글리신(glycine)을 제외하고 자연에 존재하는 아미노산들은 모두 카이랄성을 띠고 있어서 D-형태와 L-형태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지구상의 생명체는 거의 대부분 L-형태의 아미노산만을 쓴다. 나아가 아미노산들을 붙여 나선형(alpha-helix) 폴리펩타이드를 만들 때도 오른쪽으로만 감기게끔 만들어낸다(반면 D-형태의 아미노산을 가지고 폴리펩타이드를 만들면 왼쪽으로 감긴 나선이 얻어진다). 즉 아미노산의 카이랄성이 상위 수준인 폴리펩타이드 고분자의 나선형으로 전파 및 증폭되는 것이다. 그런데 태초에 유기 화합물이 처음 생겨났을 때에는 편향이 있었을 리 없으므로 둘이 반반씩 존재하는 대칭 상태로 얻어졌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현재 지구상의 생명이 한쪽 이성질체만을 쓰도록 진화했다는 것은 초기 진화 단계에서 모종의 이유로 대칭이 깨져 한쪽 이성질체가 살짝 많아지는 상태가 형성된 다음, 카이랄성이 점점 증폭되어 한 종류의 이성질체만 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떻게 카이랄성이 생겨나고 증폭되었는지는 생명의 기원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아미노산의 두 이성질체 구조가 상호전환되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상당히 크지만 지표 온도에서도 일어날 수는 있다. 따라서 “어쩌다가” 한쪽 이성질체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일이 확률적으로 발생할 수 있으며, 뒤이은 카이랄성 증폭 과정을 통해 단일한 카이랄성이 고정될 수 있는 일도 일어날 수 있을 법하다. 이 “확률론적”(stochastic) 이론대로라면 D-와 L-형태 중에서 L-아미노산만을 생명체가 쓰게 된 이유는 순전히 우연이다(다른 멀티버스에서는 D-아미노산을 쓰는 지구가 있을 지도 모른다). 반대로 “결정론적”(deterministic) 이론은 비대칭적인 외부 요인에 의해 대칭성 붕괴가 일어났을 것으로 본다. 우주의 근본적인 힘 중 하나인 약력에서 발견되는 비대칭성을 비롯해 우주에서 방사선 입자인 뮤온이 내리쬐는 방향에 따른 자기 분극(magnetic polarization) 등 다양한 요인이 거론되는 가운데, 시계 혹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진동하면서 나아가는 빛으로 근본적으로 카이랄한 에너지인 원편광(circularly polarized light)도 카이랄성이 유래한 기원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실제로 오리온 성운의 별이 태어나는 지역에서 산란으로 인해 적외선 원편광이 강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관찰된 바 있다. 특히 원편광은 분자와 직접 상호작용해서 반응을 유도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 될 수 있고, 카이랄성 분자들은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원편광과 왼쪽으로 회전하는 원편광을 흡수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원편광을 반응에 쓰면 한쪽 이성질체를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이를 토대로 운석에서 발견되는 아미노산에서 한쪽 이성질체가 과잉되어 있는 현상과 지구상의 단일한 카이랄성 모두 보다 낮은 파장의 원편광에서 기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혹은 우주에서 날아온 아미노산 자체가 반반이던 지구상의 아미노산 이성질체 비율을 바꾸어서 한쪽으로 쏠리도록 유도했을 지도 모른다.

대칭성이 깨진 다음 어떻게 한쪽 카이랄성의 아미노산 이성질체만 남는 단계까지 이르렀을지를 설명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카이랄성이 같은 분자들끼리 더 잘 뭉친다거나, 다음 분자를 만드는 반응에 관여할 때 한쪽 이성질체을 더 많이 만들어낸다거나 하는 식의 과정을 거쳐 조금 조금씩 한쪽 이성질체 비율이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더 이상 원래의 반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고 L-아미노산 세상으로 수렴하는 내리막길을 타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만약 한계 시점에 도달하기 전에 반대로 회전하는 원편광이 지구에 내리쬐는 등의 일이 벌어지면 물론 다시 원래의 반반 시점을 향해 회귀할 지도 모른다. 45억년 전에 생겨난 지구상에서 최초의 생명체는 40억년 전후에 탄생했다고 추측하는데, 오른 나선 폴리펩타이드 하나 만들기가 이렇게 어려운 데도 5억년밖에 안 걸렸으니 참 빨랐던 셈이다. 


답을 모르는 문제

연구라는 것이 모르는 문제에 대해 답을 찾는 과정이기는 하지만, 타임머신을 발명해 태초로 돌아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관찰하지 않는 이상 정확한 답을 알 길은 없다. 유기물이 생성되고 한쪽 방향의 카이랄성으로 수렴할 수 있는 경로를 찾아내더라도 그건 하나의 가능성일 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 해당 경로를 따라 생명체가 출현했을 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태초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는 정답이 없기에 아주 좋은 문제이기도 하다. 국가에서 연구비를 지원받아 연구를 할 때 목적을 분류해야 하는데, 이런 질문들은 그 중에 “지식의 진보(비목적성 연구)”라는 부분에 잘 어울리는 주제가 된다. 기초 연구의 많은 부분은 이처럼 호기심과 궁금증에서 시작하여 탐구를 통해 획득한 지식으로 인류의 지식 창고에 조그만 조각을 더하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근미래의 혁신을 꿈꾸는 응용 연구들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앞으로 몇십 년 후에 우리가 어떤 것을 필요로 할지는 정말 알기 어렵다. 다채로운 기초연구들이 활발히 이루어져서 지식의 지평이 넓어지면, 언젠가는 그중에서 혁신적인 개념의 과학이 태동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술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예컨대 카이랄성을 띠는 원편광을 잘 만들 수 있다면 안경을 써야만 입체로 볼 수 있는 TV에서 안경을 없앨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빛에 저장되는 정보에 원편광의 회전 방향에 따른 정보를 추가할 수 있으므로 정보 밀도를 증폭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이 된다. 액체-액체 상분리와 코아세르베이트에 관한 연구는 세포 내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깊이 이해하는 바탕이 되며 또한 프리온, 아밀로이드 단백질 등 비정상적으로 응집하면 질병으로 연결되는 기작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만큼 기초연구 또한 중요하며,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하고 기다려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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