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현의 마음을 살피는 기술

요즘 주말 밤마다 방영되는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보며, 사람들은 웃다가도 어느 순간 마음이 서늘해지는 경험을 합니다. 서울에 아파트 한 채 있고, 대기업에서 25년을 버틴 부장님. 한때는 “이 정도면 인생 성공이지”라고 여겨졌던 김낙수가, 순식간에 좌천되고, 사고와 빚더미를 겪으며 자신이 믿어온 세계가 무너지는 이야기죠. “서울·자가·대기업·부장”이라는 단어들이 한 사람의 신분과 가치를 보증해 주던 시대에, 그 타이틀이 한 번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많은 직장인이 자신을 떠올립니다.

김부장에 열광하는 이유, 사실은 우리의 이야기라서

김부장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한국 직장인에게 매우 익숙한 얼굴입니다. 회의실의 눈치 문화, 라인과 정치, 성과 압박, 말 한마디가 평가와 진로를 갈라놓는 구조까지, 그의 일상은 우리 주변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면 속에서 김부장이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대기업 25년 차 부장”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모습은, 마치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이 정도는 되는 사람이다.”

좋은 회사, 안정적인 연봉, 괜찮은 직급은 단순한 조건을 넘어 “나는 실패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자기 확신의 근거가 됩니다. 그래서 이 기반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단지 직장 생활이 힘든 수준을 넘어 “내 인생 전체가 실패한 것 같다”는 극단적인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이름보다 회사와 직함을 먼저 말합니다. “어디 다니는 누구입니다”라는 문장은 자연스럽지만, 그만큼 회사가 내 정체성의 중심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회사가 나 자신이 될 때 벌어지는 일들

오랜 시간 한 직장에 올인할수록, 우리의 마음은 점점 단순한 등식을 만들어냅니다. “내 가치 = 이 회사에서의 자리.” 명함의 로고, 직함, 연봉, 연말 평가가 곧 나를 설명해 주는 유일한 언어가 되어 버리는 것이죠. 이 등식이 굳어지면 상사의 한 마디, 조직 개편, 승진 누락 같은 사건이 “한 해가 꼬였다” 수준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실패”로 해석되기 쉽습니다.

드라마에서 김부장이 안전관리팀으로 좌천되고, 예전 부하 직원들 앞에서 어색한 미소를 짓는 장면은 많은 직장인의 악몽을 건드립니다. 역할과 자리가 변했을 뿐인데, 그는 자신이 ‘조직이 버린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낍니다. 실제로도 비슷합니다. 조직도에서 내 이름 위치가 변했을 뿐인데, 머릿속에서는 “나는 이제 끝났다”, “여기서 밀려나면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생각이 끝없이 재생됩니다. 이때 느껴지는 허무와 공허는 인생이 정말 끝났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한 곳에만 마음을 걸어 두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과정에서 오는 통증에 가깝습니다.

밤마다 이불을 적시는 식은땀, 몸이 먼저 보내는 경고

김부장은 어느 순간 공황발작을 겪고 응급실로 실려 갑니다. “대기업 25년 차 부장”이라는 껍데기 속에서, 그 역시 버티고 참아내며 쌓인 불안이 몸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진료실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자주 봅니다. 낮에는 멀쩡히 일하다가도, 밤만 되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숨이 막히는 느낌이 몰려와 잠에서 깨는 사람들, 며칠째 이불이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는 사람들 말입니다. 검사에서는 큰 이상이 없는데, 회사에서의 갈등과 압박이 몸 전체를 ‘항상 비상 상태’로 만들어 버린 경우입니다.

그 결과가 불면, 악몽, 식은땀, 두통, 소화 불량 같은 신체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내 정신력이 약해서 그렇다”고 자책하지만, 실제로는 “회사와 나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졌다”는 몸의 신호로 보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회사와 나 사이에 여백을 만드는 연습

그렇다면 답은 퇴사뿐일까요?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퇴사가 필요한 순간도 분명 존재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회사와 나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것만으로도 숨 쉴 공간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 속 김부장은 처음에는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부장님’이라는 타이틀로만 자신을 정의합니다. 그러나 위기가 깊어질수록, 그는 부장이란 옷을 벗고도 남아 있는 것들을 조금씩 보게 됩니다. 가족과의 관계, 일에 대한 오랜 감각, 사람을 향한 태도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도 비슷한 연습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명함을 내려놓고, 회사 이름과 직함을 빼고 나를 소개한다면 어떤 단어들이 남을까요. 부모, 친구, 배우자, 누군가의 동료, 책을 좋아하는 사람, 운동을 시작하려는 사람, 누군가에게 조용히 힘이 되어 주는 사람…. 이런 단어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다 보면, “회사에서의 나”와 “사람으로서의 나” 사이에 얇지만 분명한 경계가 생깁니다.

거창하게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퇴근 후 한 시간만이라도 메일과 메신저를 끄고, 몸과 마음을 회사 바깥으로 빼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 주말 일정에 “회사 밖 사람들”과의 만남을 의식적으로 넣어 보는 것. 성과와 승진이 아닌,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건강, 가족, 배움, 여유, 공정함 등)를 두세 개 떠올려 보고, 오늘 하루 그 가치에 맞는 선택을 한 가지라도 실천해 보는 것. 이런 작은 시도가 쌓일수록, 회사가 내 삶의 전부였던 세계에 서서히 다른 축이 생겨납니다.


회사가 내 인생의 전부처럼 느껴질수록, 회사 안의 갈등은 단순한 업무 문제가 아니라 생존 위기처럼 해석됩니다. 상사의 말투 하나, 동료의 표정 하나가 머릿속에서 과장되고, “이 조직에서 밀려나면 나는 끝이다”라는 생각과 엮이면서 자율신경계가 과부하에 걸립니다.

김부장 이후의 삶을 상상하는 용기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는 한 남자의 몰락기가 아니라, “김부장 이후의 삶도 있는가?”를 묻는 이야기입니다. 사회적 성공이 곧 개인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직함이 사라진 뒤에도 삶은 한참 동안 계속된다는 사실을 집요하게 보여 줍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회사 문을 나서는 날을 맞이합니다. 자의든 타의든, “부장님”, “과장님”, “팀장님”이라는 호칭이 더 이상 붙지 않는 순간이 오겠죠. 그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직급이었는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은가”라는 질문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아마도 회사 일과 인간관계 때문에 마음이 무겁고, 밤에 잠들기도 쉽지 않은 시기를 지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오늘만큼은 이렇게 자신에게 조용히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퇴사를 결심하지 않더라도, 이 질문을 자주 던지는 사람일수록 회사 밖의 삶을 준비하는 힘이 자랍니다. 언젠가 ‘서울 자가 김부장’의 꿈이 깨지는 날이 오더라도, 그 순간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장의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회사가 우리 인생의 중요한 한 챕터인 것은 분명하지만, 책 전체를 써 내려갈 사람은 언제나 나 자신이니까요.


약력

정신과 전문의 신재현 원장은 현재 강남푸른정신과를 운영 중이다. 계명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으며 인지행동치료, 불안장애치료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저서로는 ‘나를 살피는 기술’, ‘어른의 태도’ 등이 있으며 따뜻하고 진정성 있는 상담을 통해 환자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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