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AE QUARTERLY MAGAZINE

VOL.42 AUTUMN


신재현의 마음을 살피는 기술

우리의 마음은 작은 틈에서도 쉽게 흔들립니다. 식탁 위의 흔적, 메신저 알림, 친구의 소식 처럼 사소해 보이는 장면들이 어느순간 불안함으로 다가오지요. 표면적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 왜 이렇게 크게 다가올까요? 이 글은 그런 불안함을 억누르기보다, 불안함 속에서도 나만의 속도로 걸어가는 길을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밤늦게 집에 들어오면 현관에 벗어둔 신발, 식탁 위의 굳은 커피 자국, 내일 회의 메모가 눈에 먼저 들어옵니다. 별일 아닌데도 가슴이 쿵 내려앉을 때가 있지요. ‘이 길을 계속 가도 될까, 이대로는 뒤처지는 건 아닐까’ 불안은 큰 사건보다 이런 일상의 작은 틈에서 더 자주 얼굴을 내밉니다. 회사에선 시스템 바뀌었다는 메일이 오고, 아이 학원비 알림이 울리고, 밤늦게 부모님의 건강 걱정이 스쳐 지나갑니다. 뇌는 원래 ‘혹시’에 민감해서 작은 알림창 하나에도 경보를 울리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40대를 지나면서 이 불안은 생존의 걱정에서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갑니다. 오래 입고 지내던 옷- 직장인, 부모, 팀장이라는 역할이 헐거워질 때 우리의 정체성이 바뀝니다. 설렘과 상실이 뒤섞이고, 그 공백이 마음을 흔듭니다. 그래서 불안을 결함으로만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정신의학에서는 불안을 단순히 ‘불편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에게 방향을 확인하게 만드는 경고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멈춰라’가 아니라, ‘잠시 확인하고 가라’라는 신호에 가깝습니다. 차의 방향등이 깜빡이면 계기판을 한번 확인하고 다시 출발하듯이요.

불안은 불편하지만 동시에 당연한 감정입니다. 다만 불안을 억누르고 지워내려 하면 오히려 그 강도가 커집니다. 심리학 연구에서도 억압은 불안을 완화하기보다 증폭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지우개가 아니라, 불안을 ‘말’로 풀어내는 작업입니다.

종이를 반으로 접어 왼쪽에는 지금 떠오르는 걱정을, 오른쪽에는 그 걱정이 알려주는 마음을 적어 보세요. ‘앞으로가 두렵다’ 옆에는 ‘나는 준비되어 있고 싶다’, ‘뒤처질까 걱정된다’ 옆에는 ‘나는 성장하고 기여하고 싶다’ 이렇게 적다 보면 불안이 단순히 나를 괴롭히는 감정이 아니라,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를 알려주는 신호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말투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불안과 마음 사이에 거리가 생깁니다. ‘나는 불안하다’ 대신 ‘지금 불안이 올라오고 있구나’, ‘나는 못한다” 대신 ‘지금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구나’라고 표현해 보세요. 그 작은 변화 속에서 불안과 나 사이에 여유가 생기고, 그 틈새로 행동을 끼워 넣을 수 있습니다. ‘오늘 퇴근 후 20분만 자료 읽기’, ‘이번 주 금요일에는 이력서를 10분만 손질하기’ 처럼요.

말 대신 목소리를 이용해도 좋습니다. 스마트폰 메모에 대고 ‘지금 제일 걱정되는 건…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하고 30초만 녹음해 보세요. 입 밖으로 불안을 끄집어내면 마음속에서 차지하던 부피가 줄어듭니다. 동료에게 ‘10분만 내 얘기 들어줄래?’라고 부탁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해결책이 당장 나오지 않아도, 대화를 하며 감정이 털어지고 마음에 길이 열립니다.

불안은 마음의 문제이지만 가장 먼저 드러나는 건 몸의 신호입니다. 심장이 빨리 뛰고, 위장이 불편하고, 잠이 쉽게 오지 않을 때, 이는 교감신경이 과도하게 활성화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몸을 다독이는 작은 행동이 필요합니다. 천천히 물 한 잔을 마시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해보세요. 이런 행동만으로도 뇌는 ‘지금은 안전하다’는 신호를 받아들입니다. 몸이 안정되면 마음도 그 흐름을 따라갑니다.

호흡법 역시 과학적으로 입증된 방법입니다. 3초 들이마시고, 3초 멈춘 뒤, 6초 내쉬기를 3분간 반복해 보세요. 연구에 따르면 긴 호흡은 부교감신경을 자극해 심리적 긴장을 완화하고, 인지행동치료(CBT)나 수용전념치료(ACT)에서도 핵심 기법으로 활용됩니다. ‘숨’은 불안을 억누르는 도구가 아니라, 불안을 품은 채 현재에 머물도록 돕는 닻과도 같습니다. 

몸을 챙기는 작은 습관은 하루의 리듬을 회복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잠들기 전 휴대폰을 멀리 두고, 오후 두 시 이후에는 카페인을 줄이고, 저녁에 가볍게 동네를 걸어보세요. 아침에는 물 한 잔 마시고, 침대를 정리하고, 창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들이면 좋습니다. 일상의 작은 리듬이 몸과 마음을 동시에 안정시킵니다.

이제는 타인의 즐거움을 언제든 들여다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SNS에는 늘 화려한 장면이 올라옵니다. 정돈된 책상, 멋진 여행 사진, 환하게 웃는 가족들. 하지만 그것은 24시간 중 단 몇 초를 잘라낸 장면일 뿐입니다. 완벽해 보이는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흔들리고 불안하며, 평범한 하루를 살아갑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들의 ‘1초’를 나의 ‘1년’과 비교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비교는 자신을 부족하게 느끼게 만들고, 현재의 의미를 흐릿하게 합니다. 실제로 여러 연구에서 SNS 비교는 우울과 불안을 높이는 주요 요인으로 지목됩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비교를 멈추고 자기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는 태도입니다. 타인의 속도에 맞추지 않고 나의 호흡에 맞춰 걷는 것. 그것이 오래 가는 길입니다. 

결과 지표(직함, 숫자)가 아니라 과정 지표(오늘의 30분, 한 통의 연락, 한 페이지의 초안)를 세워보세요. 과정은 쌓이고, 쌓인 것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차근차근 쌓인 과정은 쉽게 흔들리지 않고, 어느새 탄탄한 결과로 이어져 있을 것입니다.

불안은 폭풍 속에서 깜빡이는 불빛과 같습니다. 멈추라는 경고가 아니라 방향을 확인하라는 신호입니다. ‘나는 불안해서 못 간다’가 아니라 ‘나는 불안하니까, 확인하고 간다’로 바꾸어 봅시다. 오늘 저녁, 불안함을 마음 한켠에 놓아둔 채 머그컵을 씻어 두고 메모장에 작은 행동 한 줄을 적어 보세요. 낡은 이력서를 10분만 손보고, 다음 주에 만나고 싶은 사람 한 명에게 안부 메시지를 보내고, 문장 한 단락만 써보세요. 그 한 줄이 내일의 방향을 바꾸고, 모레의 속도를 만듭니다. 불안을 안고 있어도 우리는 충분히 괜찮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언젠가 뒤돌아보면 알게 될 겁니다. 


약력

정신과 전문의 신재현 원장은 현재 강남푸른정신과를 운영 중이다. 계명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으며 인지행동치료, 불안장애치료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저서로는 ‘나를 살피는 기술’, ‘어른의 태도’ 등이 있으며 따뜻하고 진정성 있는 상담을 통해 환자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다.

발행일: 2024년 2월 창간일: 2014년 7월 등록번호: 영등포, 바00169 발행인: 김동녕 편집기획: 홍보팀

한세예스24홀딩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은행로 30, 6층 T. 02)3779-0800


Copyright ⓒ 2023 hansaei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