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재의 미식에세이

가공육 

샤퀴테리의 세계

기분을 낼 연말연시, 음식이 빠질 수 없다. 달콤한 케이크 등 디저트류가 어울리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짠맛 음식을 잘 챙겨 먹어야 단맛의 디저트도 더 맛있다는 의미인데 그런 맥락에 가공육이 딱 좋다. 적당히 짭짤하고 감칠맛이 있어 입맛을 돋워주는 한편, 조금만 먹는 음식이니 디저트를 위한 배도 남겨 준다.


인류는 150만 년 전부터 고기를 먹어왔지만 본격적인 냉동냉장고는 19세기 중반에 등장했다. 그 세월 동안 남은 고기에 대한 부담이 컸다. 안심, 등심, 갈비 같은 정육은 바로 먹었지만 나머지 부위는 처치가 곤란했다. 따라서 있을 때 먹고 없을 때 굶을 게 아니라 있을 때 남겨 없을 때 먹을 수 있는 보존 기술이 필요했다. 육류의 보존 및 가공은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 시도했는데 우연일 가능성이 높다. 애써 구한 고기를 짐승이 먹지 못하게 밤새 불 위에 매달아 두었더니 맛이 달라진 것이다. 고기가 익은 것은 물론 연기를 쏘였으니 맛과 보존의 두 마리 새를 한꺼번에 잡았다. 그렇게 가공육의 역사가 싹텄다.

가공육은 15세기 프랑스에서 본격적인 전환점을 맞았다. 자투리 활용의 압박에 비계를 빼고는 날고기를 팔 수 없는 현실이 거들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복잡한 공정을 거치는 테린이 등장하는 등 미식의 영역에 진입했다. 가공육의 통칭인 용어 샤퀴테리(Charcuterie)도 이때 자리를 잡았다. 

샤퀴테리는 ‘고기(Chair)’와 ‘조리한(cuit)’이라는 말을 합친 용어로, 돼지의 고기는 물론 내장 가공품을 취급하던 가게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샤퀴테리는 네발짐승은 물론 가금류나 어류 가공육까지 한데 아우른다. 한동안 대량 생산 제품에 묻혀 존재감이 없었던 샤퀴테리는 대략 15년 전부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장인정신에 입각해 직접 만든 소시지를 파는 레스토랑이며 공방이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국내에서도 일시적인 유행으로 그치지 않고 준수한 완성도의 가공육을 만드는 공방이 자리를 잡아 확장도 하고 있다. 레스토랑에서도 잘 만든 테린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 먹을 수 있다.  새로운 가공육 전성기의 원칙 여전히 ’낭비의 최소화’다. 귀한 ‘고기님’이시니 정육은 물론 자투리도 버리면 안 되며 비계마저 예외가 아니다. 이런 접근 방식을 뒷받침하는 조리 철학도 등장했다. ‘코(혹은 머리)부터 꼬리까지’다. 먹기 위해 빼앗은 생명이니 낭비하지 말자는 배려가 깃들어 있다. 

셰프들의 재료를 향한 열망도 이런 움직임을 부추겼다. 조리는 기본이고 재료의 특성을 이해한 정형 및 발골도 진짜 셰프의 덕목으로 취급하는 요즘의 분위기가 한몫 거들었다. 그래서 진공 비닐에 싸인 부위별 포장육이 아닌 동물 전체를 들여다 직접 손질한다. 스테이크도 썰어내고 소시지 같은 가공육도 만든다.

이제 셰프들의 세계에서는 뻔한 스테이크보다 자투리를 요리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진짜 실력으로 통한다. ‘코부터 꼬리까지’라는 철학을 실현하기 위한 가공법도 다양하다. 일단 절임이 있는데 소금과 설탕 모두를 쓴다. 소금이라면 재료의 표면에 묻히는 염장, 물에 타서 담가두는 염지가 있다. 연기를 쏘여 보호막을 입히는 훈제도 있는데 동시에 재료까지 익히거나(온훈), 보존을 위한 막만 입힐 수도 있다(냉훈). 지방도 제 몫을 하니, 고기를 담가 익히면 굳어 밀폐용기 역할을 한다. 모두 극단적인 환경을 조성해 부패의 원인인 세균의 번식을 막는다는 같은 원리를 공유한다.

대표적인 가공육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 번째는 당연히 소시지이다. 자투리 고기를 활용하기에 더 좋은 방법이 없는데 원칙이라면 ‘분해 후 재조립’이다. 각각은 먹기 어려운 쪼가리를 갈아 섞어 향신료와 양념으로 맛과 향을 더하고, 비계나 물로 부드러움과 촉촉함을 조절한다. 덕분에 처치 곤란한 쪼가리가 완전히 새로운 덩어리로 거듭난다. 

한편 2010년대 파인 다이닝 세계를 거쳐오며 테린 혹은 파테도 사랑을 받고 있다. 테린은 원래 음식을 담는 용기의 명칭으로 정식 명칭은 ‘파테 앙 테린(Pâté en Terrine)’, 즉 ‘도기에 담은 파테’의 줄임말이다. 따라서 내용물인 파테가 진짜인데 소시지처럼 곱게 간 고기를 틀에 담아 오븐에 넣어 삶듯 천천히 익혀 만든다.

갈고 섞고 채우는 소시지가 수고스럽다면 덩어리째 만드는 가공육도 많은데 햄이 대표이다. 햄은 사실 돼지의 허벅지를 포함한 뒷다리를 일컫는 단어다. 가공의 핵심은 염장과 숙성으로 통다리를 소금에 절인 뒤 눌러 물기를 빼고 소금기를 씻어내 매달아 말린다. 이로운 미생물의 활동인 발효가 단백질과 지방을 천천히 분해해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과 핵산을 빚어낸다. 오래 염장 및 숙성시킨 햄은 익힌 것과 마찬가지라 그대로 먹을 수 있다. ‘생 햄’이라 부르지만 완전한 날 것은 아닌 셈이다. 가장 유명한 생 햄은 이탈리아의 프로슈토다. 역사가 기원전 400년경, 로마 공화국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표 산지는 북부 산악지역인 파르마와 산 다니엘인데 법으로 보호받는다. 이곳에서 만든 프로슈토만이 정통으로 인정받는다고 이해해도 좋은데, 기후가 적당히 습하고 서늘해 숙성에 딱 좋다. 아무래도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맛은 아니어서 최소한 1년, 대체로 2년은 숙성시킨다. 느린 음식의 전형으로 최소한의 요소와 자연에게만 기대어 맛을 낸다. 이를 인간의 힘으로 앞당기려는 시도는 대개 실패했다.

프로슈토와 생 햄의 세계를 양분하는 하몽도 있다. 스페인어로 햄인 하몽은 숙성기간이 대체로 길고, 재료인 돼지나 사육방식에 따른 등급 차이를 이름으로 구분한다. 예를 들어 최상급은 ‘하몽 이베리코 드 베요타’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도토리를 먹인 흑돼지로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단지 ’하몽 이베리코‘라고만 부르는 제품은 흑돼지지만 복합 사료를 먹여 키웠음을 의미하고, 둘 사이 등급으로 ‘레체보’가 있다. 한편 ‘하몽 세라노’, ‘리제르바’, ‘큐라도’, ‘엑스트라’등의 이름이 붙어 나오는 제품은 큰 의미가 없다. 흑돼지보다 맛이 떨어지는 백돼지로 만들며, 수식어 또한 품질과는 상관없는 마케팅 수단이니 포장을 찬찬히 뜯어보고 고르자.



약력

이용재 음식 평론가 겸 번역가. 한양대학교와 미국 조지아 공과대학교에서 건축 및 건축학 석사 학위를 받고, 애틀랜타의 건축 회사 tbs 디자인에서 일했다.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했다. 저자로서 ‘맛있는 소설’, ‘오늘 브로콜리 싱싱한가요?’, ‘한식의 품격’, ‘외식의 품격’, ‘냉면의 품격’, ‘미식대담’, ‘조리 도구의 세계’, ‘식탁에서 듣는 음악’을 썼다. 옮긴 책으로는 ‘실버 스푼’, ‘뉴욕의 맛 모모푸쿠’, ‘인생의 맛 모모푸쿠’, ‘철학이 있는 식탁’, ‘식탁의 기쁨’, ‘모든 것을 먹어본 남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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