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AE QUARTERLY MAGAZINE

VOL.38 AUTUMN


서명은 교수의 과학이야기

기체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얼음을 기화시켜 1입방미터의 공간을 수증기로 가득 채운다고 상상해 보자. 압력을 조금씩 낮추어 수증기를 조금씩 빼내면 언젠가는 1입방미터 공간 안에 물 분자 한 개만 남는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분자는 온도에 따라 정해지는 운동 에너지를 가지고 공간을 둘러싸는 벽에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압력을 가할 것이며, 그 압력은 우리가 과학 시간에 배우는 이상기체 상태 방정식을 가지고 계산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물 분자 혼자서 물이 보이는 모든 성질을 발현할 수는 없다. 올해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에서는 물 분자가 몇 개나 모여야 이온을 안정화시킬 수 있을지를 연구해 보았다. 몇 개일지 짐작이 가는가?


염산은 수소 원자와 염소 원자가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분자이다. “산”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염산을 물에 녹이면 쉽게 염소 음이온과 수소 양이온으로 나누어지고 이 수소 양이온이 우리가 생각하는 산성을 나타내는 근원이 된다. 물 분자는 산소 원자를 가운데 두고 수소 원자 2개가 연결된 구조이므로, 전자가 풍부한 산소 원자가 전자가 하나 없어진 수소 양이온을 잡아당겨서 안정화해 주고 전자가 모자라는 수소 원자는 염소 음이온을 둘러싸서 에너지를 낮추어 주는 원리이다. 위 연구에서는 염산을 염소 음이온과 수소 양이온으로 나누는 데 필요한 물 분자의 개수를 조사했더니 물 분자가 5개는 있어야 전하를 띠는 이온들을 안정화할 수 있어서 염산 분자가 쪼개질 수 있음을 알았다. 


즉 분자가 물질을 이루는 기본 단위인 것은 맞지만, 우리가 물질에게서 기대하는 성질을 보려면 분자들이 모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뜻이다. 

금속은 원자들로 이루어진다. 금 원자를 하나 떼어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만큼 반짝반짝한 금색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금 원자들이 모여서 일정한 개수를 넘어서야 반짝반짝하는 금덩이로 보인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노미터 크기로 금 입자를 만들어서 물에 분산시켜 놓고 색깔을 보면 마치 와인처럼 진한 붉은색을 띠고, 크기를 키울수록 보라색으로 변한다. 옛날 사람들은 스테인드 글라스의 색깔을 내기 위해서 일찍부터 금 나노입자를 모르고 써 왔다. 이르게는 4세기에 금과 은 나노입자를 분산시켜 만든 유리컵(“Lycurgus Cup”)이 남아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표면 플라스몬 공명”(surface plasmon resonance)으로 설명한다. 금속 안을 보면 양전하를 띠고 있는 원자핵들이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서로 떨어져 있고, 원자 제일 가장자리의 전자들이 떨어져 나와서 이리저리 흘러 다니면서(“자유전자”) 원자핵들을 서로 잡아당겨서 한 물질로 묶어준다. 금속 입자의 크기를 줄여서 가시광선의 파장과 입자의 크기가 얼추 비슷해지는 시점이 되면, 이 자유전자들은 위아래로 진동하는 가시광의 전기장을 따라서 한쪽으로 쏠렸다가 반대쪽으로 쏠렸다가 하면서 빛을 흡수한다. 30 nm보다 작은 금 입자들은 파란색과 녹색에 해당하는 가시광선을 이런 메커니즘을 통해 흡수하고 좀 더 장파장인 붉은색 빛은 반사한다. 따라서 우리가 보기에 금 나노입자는 붉은색을 띠게 된다. 크기를 더 키우면 이제는 붉은빛을 흡수하고 푸른빛은 반사하므로 색깔이 보라색조로 변하게 된다. 


작년에 노벨화학상을 받은 “퀀텀닷”(quantum dot) 또한 나노입자인데, 카드뮴 셀레나이드(CdSe), 카드뮴 설파이드(CdS) 등의 반도체 물질을 나노미터 크기로 줄인 것이다(참고로 2024년 올해 노벨화학상은 단백질의 구조를 예측하고 새로운 단백질을 설계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David Baker 및 알파고를 개발한 DeepMind의 Demis Hassabis와 John Jumper가 받았다. 이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하기로 하자). 금속은 자유 전자가 흘러다니니까 전기가 통해서 도체이지만, 반도체는 전자가 흘러다닐 수 있는 전도성 밴드에 전자를 채우려면 밴드갭 이상의 에너지를 가해 주어야 한다. 간단히는 에너지 크기가 맞는 빛을 쬐어주면 전자가 전도성 밴드로 튀어올라간다. 


그런데 나노미터 크기로 입자를 만들면, 이렇게 만들어진 전자와 전자가 빈 자리(“정공”)는 다른 곳에 가지 못하고 입자 내부에 갇혀 버린다. 따라서 입자를 균일한 크기로 만들 수만 있다면 딱 정해진 파장에서 빛을 흡수하고 그 에너지를 다시 내놓는(“발광하는”) 입자를 만들 수 있다. 이제까지 개발되었던 물질들의 흡광 및 발광 스펙트럼을 보면 파장 범위에 비해서 매우 선명한 색깔을 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노벨화학상은 물리학상에 비해서 연구 성과가 산업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중요하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삼성전자가 QLED를 상용화하지 않았다면 퀀텀닷에 노벨화학상이 주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QLED에 바로 퀀텀닷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QLED는 하얀색을 내는 백라이트가 그대로 들어가고 퀀텀닷은 기존의 컬러 필터를 대체하는 소재로 쓰는데, 궁극적으로는 OLED처럼 백라이트 없이 퀀텀닷 자체가 전자를 받아서 빛을 내도록 하는 것이 목표이다. 

이처럼 나노미터 크기로 물질을 줄여보면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성질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나노미터 크기의 물체를 그전에는 못 만들었던 것도 아니고(고분자는 분자 자체의 크기가 수–수십 나노미터이고, 계면활성제 분자가 뭉쳐서 만드는 마이셀 또한 나노미터 크기의 연성 입자이다) 앞서도 이야기했다시피 금 나노입자도 이미 이용해 왔지만, 왜 이렇게 다른 일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고 규명한 원리를 바탕으로 정교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은 크게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나노과학기술의 붐이 일었고, 지금까지도 현대 과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금 나노입자와 퀀텀닷은 흔히 금 이온과 같이 입자를 이루는 구성 요소의 전구체를 용매에 녹이고 반응을 통해 입자를 만드는 “바텀-업”(bottom-up) 방식으로 만들어지며, 반응 시간, 온도, 표면을 감싸주는 리간드 등 다양한 요인들을 바꾸면서 입자의 크기나 형상을 조절한다. 나노과학기술을 이야기하는데 빠뜨릴 수 없는 반대 방식은 바로 “탑-다운”(top-down) 방식으로 먼저 우리가 설계도를 그린 다음 그에 따라서 나노구조를 찍어내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방식은 바로 반도체 회로를 만드는 데 쓰이는 리소그래피로, 기판 표면에 포토레지스트를 코팅한 다음 우리가 원하는 곳에만 구멍이 나 있는 포토마스크를 통해 빛을 비추면 화학반응을 통해 빛이 닿은 부분과 닿지 않은 부분 중 한쪽만 녹여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얻어진 패턴을 아래 기판에 전사해서 설계도대로 회로를 만든다. 

필자는 대학교 시절 포토레지스트를 연구하는 실험실에서 연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193 nm 빛을 이용해서 100 nm보다 작은 패턴을 만들기 어려우니 궁극적으로는 157 nm로 파장을 줄여야 하고 그러려면 그에 맞는 포토레지스트를 개발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런데 파장을 줄여 장비를 다 바꾸어야 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고 기판 위에 액체 방울을 떨어뜨려서 빛이 굴절되게 함으로써 선폭을 줄이는 기법, 한번 패턴을 만든 다음 기판을 조금 옆으로 움직여서 새로운 패턴을 덧씌워서 패턴 사이 간격을 줄이는 기법 등이 개발되면서 193 nm를 쓰면서도 20 nm보다 작은 패턴들을 잘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인텔이 올해 말 1.8 nm 공정, 삼성전자가 2027년 1.4 nm 공정, TSMC가 2026년도 1.6 nm 공정으로 반도체를 양산하겠다고 계획을 밝힌 상황이다. 이 정도면 포토레지스트 입장에서는 고분자들을 어떻게든 길이를 똑같게끔 만든 다음 한 줄로 줄세워야 할 지경이다. 광원 측면에서도 이제는 정말 한계가 임박한 것으로 보이며 요즈음에는 157 nm가 아니라 아예 매우 짧은 파장의 극자외선(EUV)이나 아예 전자빔을 써서 패턴을 만드는 방법들을 연구하고 있다. 기술이 어떻게 발전할지 예측하기는 정말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자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회사는 어떻게든 기존 공정을 유지하면서 성능을 향상하는 방안을 선호한다는 교훈이기도 하다. 또한 선폭을 줄여서 반도체를 더욱 집적화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나날이 줄어들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반도체가 다른 형태로 진화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대표적으로 2차원 평면에서 회로를 꾸미는 데에서 벗어나 3차원으로 회로를 쌓는 방식이 있다. 요즘 AI와 연관되어 뜨거운 키워드 중 하나인 고대역폭 메모리(high bandwidth memory, HBM)가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여러 층을 쌓으면서도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고 층 사이를 원하는 대로 연결할 수 있다면, 방대한 데이터를 훨씬 빠른 속도로 처리할 수 있는 메모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AI 쪽에 널리 활용되고 있다.

금 나노입자, 퀀텀닷, 반도체 리소그래피는 일상과 다소 동떨어져 있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노미터 수준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 주변에도 많다. 다만 물질을 3차원에서 쪼개어 작게 만들지 않을 뿐이다. 아무리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는 물질이라도 어딘가 끝이 있다. 바다는 지구의 70%를 덮고 있지만 그 표면은 대기와 맞닿고 있다. 물과 공기가 만나는 곳처럼 두 종류의 서로 다른 매질이 접하고 있는 부분을 우리는 “계면”(interface)이라고 부른다. 물 내부에서는 물 분자가 서로서로 둘러싸고 손을 잡으며 안정한 구조를 이루는 반면, 계면에 위치한 물 분자는 공기 쪽에 잡을 물 분자 친구가 없고 질소나 산소 분자를 잡기에는 상호작용에서 이득을 보기가 마땅치 않다. 따라서 물 분자들은 공기에 가급적 닿지 않게끔 계면의 형상을 빚어내어 내부에 비해서 불안정한 계면의 면적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두 매질이 섞이려 하지 않으므로 나노미터 수준으로 매우 얇 고 매끈하게 나누어진 계면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이유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질 때에도 빗방울은 최대한 둥근 모양을 유지하여 표면적을 줄이려 하며, 공기의 흐름이 빗방물 위아래에서 다르기 때문에 찌그러진 모양이 된다. 

 

물에 비누를 섞은 다음 공기와 물 사이에 계면을 만들어 보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비눗방울을 불고 나서 터지기 전까지 잘 보면 방울 표면에서 무지개색의 액체가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비누를 이루고 있는 계면활성제 분자는 물을 좋아하는 친수성 그룹과 공기를 좋아하는 소수성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숨을 불어넣어서 비눗방울을 공기 중으로 띄워 보내면 얇은 물 층의 표면에 계면활성제 분자들이 몰려들어 소수성 그룹을 바깥쪽으로 세우고 빼곡히 계면을 채운다. 즉 바깥쪽 공기와 물 층 사이의 계면에 계면활성제 분자들이 모이고, 물 층과 안쪽 공기 사이의 계면도 계면활성제 분자로 안정화된다. 물론 물은 계속 움직이고 증발하므로 비눗방울은 영원히 버티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에는 충분하다. 물 층의 두께가 가시광의 파장과 비슷할 정도로 매우 얇고 물의 굴절률이 공기보다 크므로, 바깥쪽 공기 계면에서 반사되는 빛과 투과된 후 안쪽 공기 계면에서 반사되는 빛의 간섭을 통해 다양한 색깔이 나타나게 된다.


서로 다른 물질을 붙이려면 계면을 잘 묶어줄 수 있는 소재, 즉 접착제 혹은 점착제가 필요하다. 표면의 성질이 서로 다른데 양쪽 다 잘 붙게 만들기는 쉬운 일이 아니나, 이종 소재의 접합은 건축, 반도체, 자동차 등 다양한 분야에서 더욱 많이 요구되고 있다. 무언가가 한 물질에서 다른 물질로 넘어갈 때는 반드시 계면을 지나야 한다. 


리튬 이온 배터리에서 열폭주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덴드라이트 형성은 바로 계면에 관계된 문제다. 전체에 비해 비록 작은 부분을 차지하더라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계면은 비눗방울에서 퀀텀닷과 리소그래피까지 나노과학기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물질의 크기를 줄일수록 단위 질량당 표면적은 넓어지기 때문이다. “더 작게, 더 작게”는 “더 넓게, 더 넓게”와 통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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