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AE QUARTERLY MAGAZINE

VOL.37 SUMMER


서명은 교수의 과학이야기

필자가 대학원 때로 기억한다. 후배가 동그란 검정 통에 들어 있는 초콜릿을 가져와서 권했다. 쓴맛의 초콜릿이 은근히 매력 있어서 직접 사먹었던 기억도 난다. 오늘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통에 커다랗게 쓰여있던 낯선 이름 때문이다. 대체 “폴리페놀”은 뭘까? 

페놀과 폴리페놀

대학에서 화학과에 들어가면 보통 2학년 때 유기화학 시간에 방향족 고리에 하이드록실 기가 결합되어 있는 구조의 화합물로 “페놀”을 배운다. 즉 벤젠에 물의 반쪽이 붙어있는 형태의 분자다. 음? 벤젠은 1급 발암 물질인데 그럼 페놀은? 페놀은 소량은 목이 아플 때 뿌리는 스프레이처럼 살균용 의약품으로 쓰이지만 많이 흡수되면 죽을 수도 있는 독성 물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 낙동강에 페놀이 유출되어 큰 문제가 된 바 있다. 필자처럼 고분자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폴리”라는 단어가 너무 친숙하다. 고분자를 영어로 “폴리머(polymer)”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반복단위(=mer)를 여러 개(=poly) 붙여서 고분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요즘 3D 그래픽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인 “폴리곤(polygon)”도 마찬가지로 각이 여러 개인 다각형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니 “폴리페놀”은 페놀이 여러 개 붙어 있는 화합물일까? 어떻게 페놀은 먹으면 안되는데 폴리페놀은 먹어도 괜찮은 걸까?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왜 몸에 좋다고 광고하는 것일까?

화학구조 그리기

페놀과 폴리페놀의 화학 구조를 아래 그림에 보였다. 먼저 위쪽의 페놀 구조를 보자. 유기화학에서는 구조를 그릴 때 가장 자주 나오는 원소인 탄소(C 원자)는 점으로 대신하고, 탄소에 연결된 수소(H 원자)는 생략한다. 그러니 그림에서 한 줄은 탄소-탄소 단일 결합이다. 모서리를 차지하는 탄소 입장에서 보면 각 탄소 원자는 네 개의 팔을 뻗어 다른 원자와 연결될 수 있으므로, 연결된 선의 개수를 4에서 빼면 나머지가 해당 탄소 원자에 연결된 수소 원자의 개수가 된다. 모서리가 두 줄이면 탄소-탄소 이중 결합인 셈이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육각형이 케쿨레가 뱀이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을 보고 깨달은 방향족 고리에 해당한다. 산소 원자에 수소가 두 개 붙어있으면 물(H2O)이고, 방향족 고리에 붙은 -OH는 하이드록실 기라고 부른다. 산소(O 원자)는 자주 나오지 않으니까 따로 표시하고, 여기 연결되어 있는 수소도 그려준다. 이렇게 해서 아래 그림이 나온다. 


아래쪽에는 요즘 들어 더욱 유명세를 타는 분자로 와인의 쓴맛을 담당하는 탄닌산(tannic acid)을 예로 들어 폴리페놀 구조를 그렸다. 페놀에 비해서 훨씬 큰 분자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하이드록실 기의 숫자를 보면 가장자리에 있는 방향족 고리에는 고리당 하나가 아니라 세 개씩 붙어 있고, 하나 안쪽에 있는 고리에도 두 개씩 붙어 있어서 페놀보다 훨씬 많다. 폴리페놀이라는 이름은 방향족 고리에 하이드록실 기가 “여러 개” 연결되어 있는 특징을 가리킨다. 자연에 존재하는 폴리페놀들은 녹차에 들어있다고 해서 유명한 카테킨(catechin)처럼 페놀보다는 커도 엄청 커다랗지는 않은 분자도 있고, 탄닌산처럼 여러 개의 방향족 고리들이 서로 붙어서 거대한 분자를 이루는 경우도 많다. 탄닌산쯤 되면 고분자 친구라고 보아도 손색이 없다. 카카오에는 무게 기준으로 약 6-8%의 폴리페놀이 들어 있는데, 카테킨이 속하는 플라비노이드 계열의 화합물이 대부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폴리페놀은 카카오와 녹차처럼 주로 식물과 과일류에 함유되어 있고, 또 해조류에도 분포하고 있다.  

활성 산소

폴리페놀의 역할로 주로 항산화 작용을 이야기한다. 그러면 꼭 따라 나오는 이야기가 활성 산소(reactive oxygen species, ROS)이다. 산소 분자가 다른 물질과 반응해서 산소 원자를 넘겨주는 반응이 대표적 산화 반응이라면, 수소 원자를 넘겨주는 반응은 이와 반대되는 환원 반응이다. 그런데 산소를 포함하면서 산소 분자보다 반응성이 큰 과산화수소(H2O2 – 우리가 다치면 소독할 때 쓰는 거품나는 약!) 같은 분자들이 몸 안에서 생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이러한 분자들은 세포가 작동하는 기작을 조절하는 데 참여하지만, 어쩌다가 너무 많이 생기면 DNA를 공격해서 세포를 망가뜨리게 된다. 물론 우리 몸에는 항산화 시스템이 있어서 ROS가 많이 생기지 않게 처리하지만, 항상 문제라는 건 무언가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아서 생기는 법이다. 따라서 항산화 작용을 하는 물질을 많이 섭취하면 ROS에 의한 피해를 예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이 동네의 대표적인 물질이 비타민 C이다. 다른 얘기지만 노벨 화학상과 평화상을 수상한 과학자로 유명한 라이너스 폴링은 감기 예방에 좋으니 비타민 C를 하루에 2 그램씩 먹으라고 했다고 한다. 본인은 93세까지 장수했지만 그게 비타민 C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최근 연구를 보면 COVID-19에 대항하는 데 비타민 C의 NO에 대한 항산화 능력이 중요하다는 얘기도 나오기도 한다. 폴리페놀 또한 항산화 작용이 탁월한 물질이다. 방향족 고리에 붙어 있는 저 많은 하이드록실 기들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산화성이 높은 물질을 만나면 폴리페놀은 하이드록실 기의 수소를 넘겨주면서 자신이 쉽게 산화되어 퀴논(quinone) 형태로 변화한다. 자신이 먼저 희생하는 메커니즘을 통해서 다른 분자가 ROS에 피해를 입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 그렇다고 많이 먹으면 갑상선 호르몬의 불균형을 야기한다는 얘기도 있고 하니 뭐든지 과한 건 부족함만 못한 것 같다. 

폴리페놀의 산화 반응은 일상 생활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데, 사과를 깎아 놓으면 갈변되는 이유가 사과 안의 폴리페놀이 효소에 의해 산화되면서 퀴논 형태로 변하기 때문이다. 퀴논들은 서로 쉽게 결합할 수 있고 길어질수록 색깔이 짙어져서 갈색으로 변한다. 우리 몸에서 멜라닌 색소가 만들어지는 기작도 비슷하다. 피부가 검어진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멜라닌은 아마도 피부암을 예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즉 ROS는 자외선을 많이 쬐면 더 많이 생긴다고 알려져 있는데, 피부에서 멜라닌이 만들어져서 햇빛을 더 많이 흡수함으로써 세포 속에서 ROS가 많이 생기지 않게 보호하는 것이다. 

어디나 달라붙는 폴리페놀

도자기 잔에 홍차를 따라 마시기를 오래 하다 보면 표면에 갈색 얼룩이 생겨서 없어지지 않는 일이 생긴다. 와인을 하얀 순면 와이셔츠에 흘리면 자주색 얼룩을 빼기 어렵다. 이것도 폴리페놀 때문으로, 와인에 들어있는 타닌산이 대표적이다. 도자기나 면의 표면은 물과 친한 친수성 특성을 지녀서 하이드록실 기와도 친하므로, 하이드록실 기가 여러 개 달린 폴리페놀은 더할 바 없이 잘 달라붙는다. 신기하게도 폴리페놀은 물과 안 친한 소수성 표면에도 붙는다. 와인을 마시면 쓴 맛을 바로 느낄 수 있는 이유가 탄닌산이 혀 표면의 소수성 단백질에도 잘 달라붙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방향족 고리와 소수성 표면 사이의 상호작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단 한번 붙고 시간이 지나 멜라닌이 만들어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로 폴리페놀들이 서로 붙게 되면 표면에 꽉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게 된다. 이 접착력을 교묘하게 활용하는 생물이 홍합이다. 바위 표면에 족사를 뻗어서 몸을 붙이는 메커니즘을 과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디하이드록시 페닐알라닌(dihydroxy phenylalanine, DOPA)이라는 폴리페놀 분자가 미끌미끌한 표면에도 붙을 수 있는 능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어 다른 과학자들이 DOPA 분자를 물에 녹인 다음 원하는 물체를 담갔다 꺼냈더니 물체 표면이 폴리DOPA로 코팅되는 것을 보고 친수성 표면과 소수성 표면을 모두 코팅할 수 있는 기술로 개발했다. 

이 기술은 성질에 관계없이 다양한 표면에 적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번 코팅된 표면의 표면 또한 폴리페놀이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원하는 분자들을 한번 더 올려서 쓰임새에 맞는 다양한 표면 성질을 구현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 코팅 기술을 비롯해서 폴리페놀 연구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대표적 석학이 카이스트 화학과의 이해신 교수다. 이 교수는 폴리페놀을 이용해 조직을 붙일 수 있는 접착제, 혈관을 빠르게 붙이는 지혈 패치, 찌른 다음 빼면 이미 붙어서 피가 나지 않는 주사 바늘 등등을 선보인 바 있다. 갈변 현상을 응용해 머리를 감는 것만으로도 흰머리 색깔을 점점 갈색으로 바꿔주는 샴푸는 새치 염색에 지친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했고, 이어 개발한 제품으로 폴리페놀이 코팅되면 머리카락이 뻣뻣해지는 현상을 이용한 볼륨 리프팅 샴푸도 반응이 좋다. 이해신 교수의 다음 샴푸는 무엇일지 필자도 궁금하다. 

머리 심는 폴리페놀 접착제 

이해신 교수는 필자를 모발의 세계에 인도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해신 교수가 개발한 생체조직용 폴리페놀 접착제를 좀더 강력하게 만들 수 없을까 하는 생각으로 공동연구를 시작한 결과, 모두 생체친화적인 물질을 쓰되 두 종류의 고분자를 조합함으로써 훨씬 단단한 접착제를 만들 수 있음을 알았고 심지어 열처리를 해주면 더욱 단단해지는 특이한 성질을 보이는 것도 알아냈다. 그러나 상온에서는 흐름성이 낮은 탓에 어디에 적용해야 할지 한동안 고민에 빠져 있었는데, 이 교수는 온도를 올려서 접착제를 말랑말랑하게 만든 다음 머리카락 끝에 묻히고 두피에 심는 아이디어를 제안해서 시연해 보였다. 두피에 심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 동안 온도가 적당히 식기 때문에 열처리가 되는 셈이고, 단단해진 접착제는 머리카락과 두피를 꼭 잡아주게 된다. 생체적합성 물질이니 2주면 분해되고 염증을 일으킬 일도 없다. 쥐 엉덩이에 실험해 본 결과 정말 이렇게 만든 경우에만 심은 채로 제법 버티는 결과를 얻었다. 물론 모낭을 통째로 옮겨 심는 자금의 모발 이식에 비해 머리카락을 잘라 접착한 것이다 보니 자라지는 않지만, 시술 후에 다시 머리카락이 빠져서 더 이상 옮길 모낭이 없을 때 답이 없는 현재 기술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이 일을 논문으로 발표했더니 방송 인터뷰는 물론이고 정말 여러 곳에서 연락을 받았다. 지금까지 필자가 해왔던 연구 중에 가장 대중적인 관심을 끌었던 일이 아닌가 싶다. “정말 되면 노벨 평화상이 멀지 않았다”는 평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호기심에 차서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 과학자의 본분이겠지만, 삶을 보다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꿈꾸는 것도 그만큼이나 중요한 과학자의 몫이 아닐까? 이 세상 모든 과학자에게 응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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