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어둠 속에서만 가능한 것  

<키메라>

찬란한 햇빛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나는 가끔 영화관에서 나온 직후 마주하는 태양이 야속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세속에의 복귀를 가차 없이 알리는 밝은 빛은 좀 전까지 내가 품었던 신비의 많은 부분을 순식간에 퇴색시킨다. 크레딧이 끝나기도 전에 퇴장로의 출입구가 휙 열어젖혀질 때 상영관 안에 응집한 기운들도 우수수 휩쓸려 나간다. 스마트폰의 불빛이 쌓여있는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를 가리킨다면 증발의 속도는 더더욱 빨라진다. 활동하는 바깥 세상에 대적하기에 극장의 어둠은 언제나 짧고 비밀스럽다. 복도를 느릿느릿 걸어 나가면서 나는 지하에서 다시 지상으로 향하는 <키메라>의 도굴꾼 아르투(조쉬 오코너)를 생각한다.

도굴죄로 복역 후 갓 출소한 고고학자 아르투는 토스카나로 향하는 기차 위에서 잠들어 있다. 영화의 배경은 1980년대 초, 꾀죄죄한 크림색 린넨 정장을 입고 햇볕 속에서 꿈을 꾸는 남자는 죽은 연인 베니아미나와(일 비아넬로)와의 재회만을 기다린다. 그 밖에는 남자가 지금 어디로, 무엇을 위해 가고 있는지 제대로 알 길이 없다. 이어지는 일들도 사건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신비 체험에 가깝다. ‘키메라’라 불리는 초능력을 이용해 고대 에트루리아 유물의 매장지를 감지 해낸 뒤 약탈한 물건을 수상한 딜러 스파르타코(알바 로르바케르)에 팔아넘기는 과정이 펼쳐진다. 아르투의 곁엔 욕심 많고 순진한 집시 갱스터들이 떠돈다. 지하의 영화 <키메라>가 가장 긴 시간 머무는 무덤이 있다. 아르투의 감지 능력은 도시 외곽의 어느 거대하고 흉측한 발전소 근처로 도굴꾼 일행을 이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그늘진 땅, 이곳을 파헤쳐 에트루리아 신전으로 통하는 입구를 발견했을 때 <키메라>의 카메라는 갑자기 인물들을 버려두고 홀로 잠입하기를 택한다. 나는 아르투보다 먼저 2500년 전 조각된 여신의 얼굴을 먼저 마주하는 특권에 흠칫 놀란다. 극장의 어둠이 마치 무덤의 어둠처럼 변모하는 순간이다. 추측하건대,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영적 카메라는 인간의 침범 이후 지하세계의 모든 것이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지 않을 것임을 짧은 몽타주로 전하려 한다. 희게 빛나는 대리석 조각상, 벽면에 부드럽게 내려앉은 프레스코화들이 불청객의 방문을 아직 알지 못한 채 잠들어 있다. 그리고 마침내 갱단이 침입하는 순간, 지상의 공기에 의해 주술사의 결계가 한번 깨어져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벽화의 색이 바래고 조각상은 은은한 미소를 잃는다. 그 모습마저 여전히 경외롭긴 하나, <키메라>의 카메라가 발설한 비밀을 공유하게 된 관객은 은밀히 탄식한다. 녹슬고 날아가버린 것, 그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리도 연약히 부서지고 말았을까. 토스카나 출신의 시인이자 방랑자, 디노 캄파나가 1914년 발표한 시집 <오르페우스의 노래>로부터 조형한 캐릭터 아르투는 죽은 연인을 만나기 위해 지하를 떠돈다는 설정에서 어렵지 않게 신화적 인물로 다가온다. 그는 신화의 전통 속에서 살아숨쉬기에  관객 역시 아르투의 여정을 한 발짝 물러난 자리에서 지켜보게 된다. 일생일대의 무덤을 발견한 이후 뜻 모를 불안감을 느끼는 아르투에게서 감정의 개연성을 따지기보다 그의 운명을 헤아리게 되는 이유다. 한 사람이 고고학자이면서 도굴꾼이란 사실의 모순성과 마찬가지로, 그가 도굴에 성공할수록 더 큰 경매가가 제시될수록 유물의 비극은 커진다. 요컨대 아르투의 시련은 사랑하는 것을 모독함으로써 성립되는 자기 정체성에 기인하므로 그는 스스로 발목을 묶어 거꾸로 매달린 사람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다. 나는 고고학자와 도굴꾼, 초능력자가 아니면서 아르투같은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지상을 살아가지만 지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 그곳에서 이따끔 맑고 훌륭한 것을 건져올리고 싶어하는 사람들 말이다. <키메라>의 답은 위로도 낭만도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이 우화이기 때문이다. 근심하는 인간 아르투는 영화 말미에 퇴로가 차단된 흙더미 속에 완전히 갇혀버린다. 잔인하게도 아르투가 그것을 받아들인 다음에야, 더이상 중간자가 아니게 된 다음에서야 그토록 고대했던 붉고 아름다운 실마리가 그에게 주어진다. 유물의 입장에서 볼 때 <키메라>는 어둠과 무덤이라는 그들의 따뜻한 고향에 다시 도착하는 이야기다. 



이 영화가 신비로운 연대기를 시작하는 1980년대 이전까지, 토스카나 사람들의 발 밑에서 잠들어 있던 고대 에트루리아 유물은 2500년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았다. 어느 시절의 인간들은 무덤 속 유물을 만지면 불행해진다든가(할리우드 영화 <툼레이더> <미이라> <인디아나 존스>가 학습했듯!) 노한 영혼이 복수할 거라는 사실을 믿었다. <키메라>의 시대에 이르러 신자유주의는 보이지 않는 것을 결코 믿지 못하게 주문한다. 유물을 쟁취할 자유, 팔아넘길 자유가 인간의 손에 쥐어졌다. 당장 지난해만 해도 이탈리아 정부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약탈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국 미술상이 제공한 7점의 에트루리아 예술품을 돌려달라는 성명을 보낸 바 있다. 물론 <키메라>에서 약탈당하고 팔리게 된 것은 국제 밀매가 성행하기 시작한 80년대의 유물만이 아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그 너머의 무형적 가치들, 두려움과 염원이 공존하는 날 것의 영혼, 그리고 진실하게 사랑하는 능력이다.

그러니 나는 곧 불이 켜질 극장에서 너무 서둘러 나가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독인다. 이 모든 것들이 팔리고 유통되기 이전의 날들을 잠시 상상해본다. 로마 이전에 이탈리아의 독자적 문화를 구축한 원주민인 에트루리아인들을 사랑해 마지않는 로르바케르의 말을 떠올린다. 감독은 그들이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발 밑에 철저히 숨기기 위해 건축하는 민족”이라고 했다. 로마인들이 콜로세움과 대극장을 짓기 이전에 에트루리아 사람들은 무덤 아래 숨겨진 성소 히포게아에 빼곡한 진실을 불어넣었다. 나는 화려한 칸의 햇살이 너무 눈부신 나머지 본의 아니게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로 로르바케르가 덧댄 말을 기억한다. 


“자신의 창조물을 숨기기 위해 창조하는 민족은, 특히 SNS에서 전세계에 자랑하지 않고는 케이크 하나도 만들 수 없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참 이상하긴 하지요.”


어느 것 하나 보여주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에,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고유해지는 것들을 <키메라>는 일깨웠다. 


감추어짐으로써 완성되는 것, 고립 속에서 비로소 빛나는 것은 집단적 역사 속에도, 개인의 미시사에도 제각기 존재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아르투는 그리 갈망하지 않으나 그럼에도 아르투를 무던히 사랑하는 한 사람, 모래 바람이 날리는 영화에서 꿋꿋이 노래하는 인물에게 로르바케르 감독은 자기 나라의 이름(이탈리아)을 붙였다. 버려진 기차역에 여성과 아이들이 모여 사는 이상적 돌봄의 공동체를 보여주는 <키메라>의 막간극은 부유한 요트가 표상하는 이 세계의 지상에서 우리가 상실한 한 단면이자, 지금이라도 선택할 수 있는 무엇이다. <키메라>의 ‘거꾸로 보기’는 죽음을 경유해 대안, 비주류, 틈새, 구석, 지하를 긍정한다. 영화 포스터이기도 한 타로카드의 12번째 메이저 카드, 거꾸로 매달린 남자의 그림을 들여다보자. 남자의 머리는 지하를 향해 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지상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나무 위의 밧줄에 단단히 매달려 있다. 분명 괴로울 것이 틀림 없는데, 그의 자세는 형벌처럼 보이지 않기에 눈길이 간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래왔다는 듯 평온한 표정인데다 한쪽 무릎을 굽힌 포즈에서는 미세한 낙관마저 읽힌다. 이 운명의 지시대로라면, 비록 아르투처럼 온전히 무덤에 머물 수는 없어도 가끔은 비밀 속으로 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 정방향으로 위세를 불려가는 세상을 잠시 등지고 잃어버린 것들을 감지하는 시간을 믿게 된다. 기어코 혼자 영화관에 가서 어둠을 자처하는 이들의 정신에서 벌어지는 일, 그것 또한 키메라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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