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보베르데에 도착한 첫날에 파리 소녀는 해맑게 단평한다. “집이 좁네요.” 어느 날은 아무렇지 않게 아빠가 전달한 돈봉투를 내민다. 긴장한 성인 관객들을 뒤로하고 카메라는 유유히 다른 각도로 나아가지만 서구의 양심에 민감한 백인 평자들은 한층 신랄한 코멘트를 보탠다. 이 영화의 한 과정이 글로리아를 독차지하려는 클레오의 여정임을 고려할 때, 그 과정에서 이 철없는 소녀가 지극히 그 나이다운 악랄함도 잠시 구사한다는 점까지 감안하여, <클레오의 세계>를 후기 식민주의에 대한 우화로 읽는 것이다. 도식적이긴 하나 결코 틀린 말도 아니다. “유럽의 제국주의적 사고는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소유권뿐만 아니라 그 관계의 선의에 대한 믿음에 빠져 왔으며, 식민지인들이 독립을 요구할 때 당황과 분노, 그리고 종종 폭력을 유발했다”는 역사적 서술과 <클레오의 세계>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 바로 이 지점, 식민주의의 후손들에게 작동하는 양심의 문제와 그 알레고리를 완전히 감추지 않으면서도 <클레오의 세계>가 사랑의 가능성을 담보하는 것이 제법 신기하다. 마리 아마추켈리 감독은 머리보다 심장에 밀착한 자세를 취하며 어느 비혈연 관계의 진정한 우정을 더 큰 진실로 택한다. 이쯤 되면 영화의 의도보다 방법을 질문해야 한다. 어떻게? 어떻게 그 가능성을 말할 수 있는 걸까. 붓으로 직접 그린 뒤 프로크리에이트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배경은 디지털 작업한 <클레오의 세계> 속 애니메이션 푸티지는 거칠고 추상적인 몇몇 풍경을 보여준다. 오프닝에서 처음 등장해 클레오의 여름 여행이 전개되는 동안 종종 틈입하는 이 애니메이션이 담아내는 것은 사실의 재현이 아니다. 거친 풍랑을 헤치고 바다를 건너오는 구릿빛 피부의 여자를, 누군가의 관에 꽃을 던지는 손길을, 피부를 감싸오는 또 다른 피부를, 그리고 어느 섬마을의 화산이 폭발하는 상상 속 풍경이 누구의 것인지 어렵지 않게 떠올려본다. 클레오가 애써 그려낸 글로리아의 삶이 거기에 있다. 딱 클레오의 인지만큼 그려진 이 세계가 뭉클한 것은 어린이의 정서적 충격을 고려해 어른이 말해주지 않는 것들에 대해 작은 인간들 ― 우리들 ― 이 실은 얼마나 맹렬히 생각해내고 있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내가 아닌 타인의 상태를 있는 힘껏 상상하는 이 무구한 시도로부터 세상의 그럴싸한 이치는 종종 무용해진다. 방학이 끝나고 둘은 세자리아 에보라 공항에서 헤어진다. 이번에 카메라가 먼저 따라가는 것은 클레오가 아니라 혼자 돌아 나오며 울음을 터뜨리는 글로리아다. 활주로를 배경으로 뒤늦게 치솟아 오른 여자의 눈물은 전에 한번 클레오의 것이었던 적 있다. 클레오는 글로리아가 떠나던 날 밤 창밖을 내려다보며 방 안에서 숨죽여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서로를 위해 몰래 운다. 뒤늦게 우는 두 여자에 대한 대구법은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는 일이 곧 그를 해방시키는 것임을 전하는 이 영화의 방식이다. 짓다 만 호텔과 새로 키워야 할 아이, 유예된 수많은 관계들을 향해 돌아가는 글로리아의 눈물에 서린 복잡한 회한을 보면서, 나는 이 이별을 슬퍼하기보다 혼자 걷는 글로리아를 사무치게 축하하고 싶어진다. 영화는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잠시 뒤돌아보는 클레오의 몸짓으로 문닫는다. 아이 앞에 남은 날들이 글로리아의 것보다 훨씬 길 테지만, 이 헤어짐의 대목에서 카메라는 울며 걸어가는 나이 든 여자의 길 위에 훨씬 더 오래 머무른다. 만약 이것이 마리 아마추켈리 감독 같은 수많은 클레오들의 기억법이라면, <클레오의 세계>는 한 가지 확실하게 희망적인 진술을 남긴다.
아이는 끝내 자라서,
나로부터 돌아섰던 타인의 표정을
볼 수 있게 되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