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가 즐기는 내러티브는 일종의 유럽식 메르헨이다. 먼 옛날, 혜성과 함께 떨어진 탑의 존재가 신비롭게 구전되듯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모호한 것을 믿어야만 하는 이야기다. 초로의 거장이 내놓은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 설교적이라는 평가는 영화 곳곳에 흩뿌려진 기호들에서 해석의 여지를 읽어내는 독자들의 강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외려 다 말하는 듯 도통 말하지 않는다. 반전주의에 대한 도덕적인 메시지나 참회를 담은 우화가 되기보단, 왜가리와 펠리컨, 거대한 사랑앵무를 히스테리컬한 주체들로 등장시켜 제국주의의 폭력을 암시한 뒤 이내 훨훨 날려 보낸다. 역사의 과오가 명백한 시대를 다루면서 영화의 태도는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 장엄한 질문과는 다르게 매우 개인적인 서사가 된다.
불시에 화마로 엄마를 잃은 소년에게 이번엔 새엄마 나츠코가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왜가리와 함께 탑을 거쳐 이세계(異世界)에 진입한 마히토는 오래전 마히토처럼 탑 속을 떠돌았던 죽은 엄마의 어린 시절인 불꽃의 소녀 히미를 만나게 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변주이자, 미야자키 하야오식 <쁘띠 마망>(셀린 시아마, 2021)이기도 한 이 대목에서 나는 문득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만나지 못한 상대의 시간까지 절실히 상상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다시 되새긴다. 그리고 이즈음 영화 초입에 마히토가 엄마의 여동생인 새엄마를 보고 놀랍도록 닮았다고 중얼거리던 순간을 생각해 냈다. 이세계에서의 갖은 모험 끝에 당도한 나츠코의 산실은 마히토가 공교롭게도 이세계의 초입에서 목격한 고인돌 앞에 차려져 있다. 무덤과 산실이 하나이고, 죽은 언니와 산 동생에게 마히토가 나란히 엄마라고 부를 때 이세계는 서서히 지각변동을 일으킨다. 말하자면, 곧 무너진다는 이야기다. 마히토가 이제 하나를 ‘배웠기’ 때문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처럼 조력자들의 애틋한 유대를 구사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서로를 끌어안은 마히토와 히미를 어느덧 이세계의 창조주 앞에 데려다 놓는다.
돌이 이세계의 주요한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돌이켜본다. 자기를 해할 수밖에 없었던 소년의 염오가 깃든 돌은 이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구조물들이 되어있다. 마히토는 우선 ‘자신을 배우는 자는 죽는다’라고 쓰인 문을 열고 들어가 거대한 고인돌을 마주했다. 이세계의 정수로 다가갈수록 그 돌들이 내뿜는 전류에 아파하기도 한다. 마침내 히미와 마히토 앞에 나타난 백발의 성자는 이미 한참 기울어져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지고 말 것 같은 돌탑을 움직여 미세한 새 균형점을 잡아낸다. “이걸로 세계는 하루 괜찮을 것이다.” 그가 마히토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위태롭게 비뚜름하여 하루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탱되는 무엇이다. 악의를 악의로 남겨두지 않고 안간힘을 써 아름다움으로 바꿔낸 세계다. 지브리의 그 어떤 작품에서보다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아를 직접적으로 투영한 듯한 이 인물이 쌓아 올린 것을 우리는 현실에서 문학이나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 따위로 부르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히토가 어머니의 어린 시절인 히미를 만나는 것과 같이 이 한 편의 영화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유년과 노년을 조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