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AE QUARTERLY MAGAZINE

VOL.34 AUTUMN



신재현의 마음을 살피는 기술

나도 모르게 스며드는 위험한 그림자

gaslighting

:가스라이팅

모든 사기 사건은 어느 정도의 가스라이팅이 포함돼 있습니다. 사기꾼은 아주 그럴듯한 궤변을 반복하며 피해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피해자는 점점 사기꾼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사실이라고 믿게 됩니다. 최근 화제가 된 사건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나오죠. 처음에는 믿지 않았는데, 반복해서 듣다가 보니까 사실처럼 느껴지고 믿게 됐다고요.


요즘 미디어에서 많이 들리는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가스라이팅입니다.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모 스포츠 스타가 엮인 희대의 사기극을 이야기하면서 종종 나오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가스라이팅은 사실이나 사건에 관한 상대방의 기억, 인지에 대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고 혼란을 주어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심리적 조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는 1938년에 극작가 패트릭 해밀턴이 발표한 희곡에서 유래됐는데, 그 제목이 가스라이트(gaslight, 가스등)입니다. 연극에서는 잭이라는 남성이 보석을 훔치려고 윗집의 여성을 살해하게 됩니다. 연극에서 등장하는 가스등은 건물 전체에서 가스를 공유하는 구조라 한 집에서 가스등을 켜면, 다른 집은 조금 어두워지게 됩니다. 잭의 아내인 벨라가 밤에 윗집에서 소음이 들리고, 가스등이 어두워지는 현상을 겪게 되고 불안해하자, 잭이 범죄사실을 숨기려고 ‘당신이 정신이상이고, 당신이 겪는 소리나 느낌은 환각’이라고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아내도 반신반의하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다 보니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남편에게 더 의지하게 되고, 상대의 프레임에 완벽하게 빠져듭니다. 이렇게 상대가 교묘하게 프레임을 씌우려고 하는 시도가 바로 가스라이팅입니다.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는 대개 귀가 얇은 사람들입니다. 이를 심리학적으로는 피암시성이 높다고 표현하는데, 상대방이 하는 말에 이리저리 잘 휩쓸립니다.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고, 잘 의지하는 성향을 가지며, 그 내면은 다른 사람들보다 불안 수준이 높습니다. 내적 불안이 타인이 주는 메시지에 매달리게 하죠. 가스라이팅의 언어 안에는 아주 교묘하게 ‘이 상황은 다 네 잘못이고, 너의 탓이다’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가해자가 주로 하는 말이 “내가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인데, 너 지금 좀 문제가 있어,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라는 말입니다. 언뜻 보면 ‘아, 이 사람이 나를 걱정해 주는구나. 내 편이구나.’라고 받아들이지만, 막상 그 속내를 살펴보면 위하는 척하면서 피해자의 불안 심리를 흔들어 놓습니다.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사람은 그런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내리려는 판단에 의구심을 갖게 되고, 또 혼란스러워집니다. 가해자는 이런 심리적인 취약함을 파고들어 상대를 자기 뜻대로 조정하려고 듭니다. 

갈등을 일으키기 싫어하는 회피적인 사람도 위험합니다. 대화를 할 때 갈등이 불편해서 ‘그래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하면서 넘어가는 이들은 타인의 말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고를 하거나, 거리를 두고 생각하기보다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강하게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의 말에 좀 더 쉽게 설득당하게 됩니다. 자신감과 자존감이 낮은 분들도 가스라이팅의 타깃이 됩니다.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이 명확하지 않다면, 아주 강한 확신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끌려가기 마련입니다. 또 자존감이 낮은 분들이 타인에게는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내적인 욕구가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과하게 신경 쓰는 사람이라면 일방적인 주장에 잘 당하게 되죠.

우리는 교묘하게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의도로 가스라이팅의 
언어를 건네지만, 
사실 내가 하는 것은 
선의를 가진 것이라는 
생각에 내부적으로는 
정당화가 됩니다.





가스라이팅의 언어는 사실 일상에서도 흔하게 나타납니다. 우리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의도하지 않아도 그런 대화를 던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어두운 의도가 숨어 있지만, 우리는 자신에 대해 무의식적인 합리화를 하려고 하죠. 자신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 반성과 자책이 계속 이어지게 되면 자신에게 상처가 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종의 방어기제인 셈입니다. 관계에서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할 때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상대가 나의 말을 잘 따라오려면 내가 하려는 것이 상대방에게도 좋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물건을 팔 때 ‘내가 꼭 이 물건을 팔려고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고…’ 라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당신을 위한 것이고, 당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거죠. 물건을 팔 때 뿐만 아니라, 가까운 연인과 친구 사이, 그리고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사실 이런 식으로 타인을 설득하려는 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가스라이팅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좀 더 악의적인 의도를 갖고 타인이 자신에게 의존하게끔 할 때입니다. 고의성과 악의가 얼마나 포함돼있냐에 따라서 선한 충고가 될 수도 있고, 악의적인 가스라이팅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이 학술적인 심리 용어는 아닙니다. 원래는 그렇게 자주 사용되는 말은 아니었다가, 미국 4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비판하기 위해 이 용어가 대중적인 관심을 받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2022년 미리엄 웹스터 사전에서 선정한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일종의 밈(meme)이자 대중적 유행어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이 남발되는 경향도 보입니다. 요즘에는 친구나 연인 사이에서도 내가 싫어하는 상대방의 말과 태도에 대해서, ‘너 가스라이팅 하지마!’라고 비난하기 위한 용도로 던지기도 합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그래서 가스라이팅이 아닌 심리적 지배라는 단어를 쓰자고 말하기도 합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이 너무 가벼워지다 보니 타인의 말에 대해서 너무 자의적인 해석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도 하니까요.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속단해 버리고, 꼬리표를 붙이면 미묘하고 중요한 내용들이 무시될 수 있습니다. 

가스라이팅 가해자들은 망설임이 없고, 자기 생각이나 의견을 확신에 차서 말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처음 만나게 되면 외려 ‘참 말을 잘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감과 에너지가 넘치는 매력적인 사람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또, 그들은 인류애가 없습니다. 나 아닌 타자에 대한 존중이나 예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소한 공중도덕이나 공공 예절에 대해서는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자신을 거스르는 일이 있으면 굉장히 화를 냅니다. 정신과적 용어로는 반 사회적 성격 장애가 있다고 진단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성향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범주 내에서 작동하는 사람은 저돌적인 CEO, 정치인, 성공적인 영업 사원이 될 테고, 사회적인 규범을 벗어나게 되면 사기꾼, 범죄자가 됩니다. 자기애성 성격을 가진 사람들 또한 조심해야할 부류입니다. 나르시시스트도 못지않게 착취적이고, 목표 지향적입니다. 타인에 대한 존중 없이 자기애만 넘치는 사람들에게, 피암시성이 높은 불안한 사람들이 쉽게 타깃이 되고 조종의 대상이 됩니다.




mental control




가스라이팅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위험한 사람의 유형을 피하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가해자들이 처음부터 ‘내가 당신을 가스라이팅 하겠다’고 덤벼들지는 않습니다. 타인에게 조종하는 단계에서 처음에는 친근함을 드러내면서 접근하고, 가까워지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가스라이팅을 할 사람들을 선별해서 피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니 친해진 사람이라도 과도하게 나를 휘두르는 모습이 보일 때 피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처음부터 마각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지만, 한참 친해지고 내 사람이라고 여기게 된 후에야 가스라이팅을 슬슬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가까워진 후에 우리가 친하기 때문에, 저 사람은 나를 좋은 사람으로 여겨주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너무 예민한 사람을 취급받을까 봐 그 사람이 하는 가스라이팅에 반박하거나, 벗어나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아무리 친하더라도 자신의 영역이 침범받고, 타인에게 과하게 휘둘린다는 것을 알아차릴 기회가 있다면 고민을 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본능적인 육감과 ‘촉’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조종당하는 과정 내내 상대에게 100% 휘둘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랑비에 옷젖듯이 서서히, 모르는 사이에 상대의 프레임에 젖어 듭니다. 하지만 분명히 휘둘리는 과정 중에도 뭔가 불편하고 찜찜함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왠지 모르게 답답하고, 불편하고, 목이 졸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거나, 한참 대화하고 나면 개운함과 즐거움보다 오히려 짓눌리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 대화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상황을 머리로 인지하는 속도보다, 감정이나 신체적인 감각이 작동하는 속도가 더 빠른 법입니다. 의심이 된다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구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자신이 원래 다른 사람에게 쉽게 끌려다니거나, 귀가 얇아서 물건을 덜컥 사고 후회를 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잘 휘둘리니까, 적당한 거리를 두자’라고 생각하며 레이더를 항상, 미리 켜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가스라이팅의 가해자 중에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의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굉장히 목표 지향적이고,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위해서는 타인의 희생이나, 자신의 죄책감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약력

정신과 전문의 신재현 원장은 현재 강남푸른정신과를 운영 중이다. 계명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으며 인지행동치료, 불안장애치료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저서로는 ‘나를 살피는 기술’, ‘어른의 태도’ 등이 있으며 따뜻하고 진정성 있는 상담을 통해 환자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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